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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충서원 처음 자리의 안내 표석 사진/2017년 11월 16일 촬영

조원교 2020. 6. 24. 20:00

14세 조태채 사충서원 옛 자리 표석,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60-12번지 앞(사실은 남쪽) 인도에 있음(2017년 11월 16일.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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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조태채 사충서원묘정비(사충서원 조원교 교정본 중 발송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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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조 이우당 조태채 공을 배향하는 사충서원의 묘정비의 번역문을 교열하라는 주문이 있어

이를 실행하여 보낸 내용 등도 이곳에 함께 올렸습니다. 

 

四忠書院: 景宗大王 在位 때인 1721-22年 사이에 있었던 悲劇的인 辛壬士禍로 犧牲된 老論의 4大臣 즉 忠獻公金昌集

先生,忠文公李頤命先生, 忠翼公趙泰采先祖, 忠愍公李健命先生 즉 四忠을 配享하기 위하여 英祖 元(1725)年 에 설립한 書院입니다.

英祖大王代부터 代代로 歷代 國王의 致祭가 頻繁하게 내려짐에서 보듯 國家 王室 士林으로부터 隆崇한 禮遇를 받았고,특히 高宗 임금 때 斷行된 書院撤廢令에서도 除外된 곳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지는 京畿道 果川縣 露梁(現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역과 사육신사당 間), 경기도 과천현 하북면 옹막리(현재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사무소 부근) 동산(東山)이라고 전해집니다. <서울시에서 세운 표석도 처음에는 사육신공원입구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동작구청에서 노량진역 서남쪽에 새 표석을 세웠습니다. 물어보니 자문회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1927년에 京仁線 鐵道의 騷音을 피하여 경기도 高陽郡 漢芝面 普光里(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28番地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때 避難民의 院宇 占領으로 避害를 입어 荒廢될 危機에 처했습니다.

이에 不得不 1968년 지금의 자리인 경기도 京畿道 河南市 上山谷洞 100-2로 이전되었다.

享祀는 每年 陽十月이며 향사일은 해마다 다릅니다.

 

사충서원 옛 자리 표석,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60-12번지 앞(사실은 남쪽) 인도에 있음(2017년 11월 16일 촬영) 2
사충서원 옛 자리 표석,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60-12번지 앞(사실은 남쪽) 인도에 있음(2017년 11월 16일 촬영) 5(노량진역 8번출구쪽을 향하여 촬영)

사충서원 묘정비(四忠書院 廟庭碑): 현재 위치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번지 

 

사충사원 묘정비

자헌대부 행 용양위 부사직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세자우부빈객 규장각제학 오재순吳載純은 글을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 세자부 홍낙성洪樂性은 글씨를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김익金熤篆額(전서로 된 이마의 글씨)을 쓰다.

 

지금 임금 5(正祖 5, 1781)년 봄에 임금(正祖)元陵(英祖陵號)에 행차하여 아래같이 傳敎하시기를

太歲辛丑은 바로 이 해이다. 先大王(英祖)께서 潛邸(왕이 즉위 이전에 살았던 私家)에서 儲位(왕의 대를 잇는 지위 즉 世子 世弟 世孫)로 들어가셨는데 이제 그 舊甲(還甲)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正祖) 小子는 오직 공경하게 추모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펼 수 있는 데가 없구나. 아아! 우리 先大王(英祖)께서는 윗대 여러 임금의 마음과 법을 계승하시고 三宗(孝宗 · 肅宗 · 景宗)血脈을 이어받아 임금 임금이 傳受한 것 같이 하셨으니, 이 지극하고 가 극진하여 우리나라 4백년 宗社가 이에 힘입어 태산 반석처럼 편안해질 수 있었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도다. 이 때에 忠獻公 金昌集 · 忠愍公 李健命 · 忠文公 李頤命 · 忠翼公 趙泰采 같은 분들이 있어서 서로 협력하여 받들다가 몸을 나라에 바쳐, 精忠大節이 밝게 빛나 지금까지 사람들의 耳目에 분명하게 남아 있으니, 이른바 하늘과 땅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質正(바른 것인지 물어봄)하여 보아도 의심이 없어 길이 天下 萬世에 떳떳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에 효경梟獍(자기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는 올빼미와 자기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은혜를 모르는 흉악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같은 무리들이 誣獄을 크게 일으켜 끝내 참혹한 화를 빚었으니 아아! 천하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先朝(英祖 朝廷) 때부터 褒獎하라는 傳敎가 여러 차레 絲綸(명령, 가르침)에 실렸고 한강 가에 祠堂을 짓게 하였으며 四忠이라는 扁額까지 내리셨다. ! 聖仁이 천하에 공정히 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은혜어린 運數가 있게 된 것이니, 이른바 公議는 일백년을 기다리지 않고 정해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舊甲을 맞아 元陵을 알현하게 되니, (正祖) 小子는 어찌 寓感(겸손한 느낌)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날을 가려 四忠祠에 승지를 보내 致祭(임금이 신하에게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이를 위로하는 제사)하게 하라.”하셨다.

아아! 우리 열성조의 지극한 과 성대한 이 지극히 皇天(하늘)의 뜻에 부합하여 크게 사랑하여 돌봐줌을 받아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보내서 왕실을 돕게 한 것이다. 살아서는 治化(잘 다스림)休明(아름답게 밝힘)을 돕고 죽어서는 종사의 轉危(뒤집어지는 위태로움)를 막았음을 이 四忠祠를 보면 徵驗할 수 있다. 옛날 우리 景宗大王께서 병이 있어 후사를 두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다. 忠獻公上相(영의정)으로 모든 大臣 六卿(육조 판서)과 함께 입대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영조를 책봉하여 世弟로 삼게 하였다. 그 후 임금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니, 世弟에게 크고 작은 國事를 대신 다스리도록 명을 내려줄 것을 모든 대신들이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聯箚(두 사람이 이상이 올리는 箚子)를 올려 肅宗 丁酉(1717719)故事를 따르시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敵豎()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거깃을 얽어매어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가지고 억지고 罪案을 만드니, 이에 대신 네 사람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다. 忠獻公은 벼슬이 영의정에 호는 夢窩, 忠文公은 벼슬이 좌의정에 호는 踈齋이며, 忠翼公은 벼슬이 우의정에 호는 二憂堂이요, 忠愍公은 벼슬이 좌의정에 호는 寒圃齋이다. 四公은 모두 先代 朝廷의 대신으로 知遇가 가장 깊었으므로 마음으로 은혜 갚기를 도모하였다. 큰 일을 당하게 되자 를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진실로 마음 속에 간직한 바가 廓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영조대왕이 즉위하자 곧 ()一鏡 등 모든 을 죽이고 네 대신의 관직을 회복시켰으며, 이어서 시호를 내렸고 儒生 尹來宬 등이 상소하여 사당을 지을 것을 청하자 윤허하였다. 丙午(영조 2, 1726) 가을에 祠宇가 비로소 완성되고 四公을 나란히 배향함에 四忠이라 편액을 내리셨는데 모두 眞影(肖像)이 있어 四忠祠 사당 안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丁未(영조 3, 1727)兇黨이 다시 헐뜯고 誣告함을 늘어놓아 사당을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乙亥(영조 31, 1755)에 임금의 토벌이 크게 행해져 흉악한 괴수들과 역적의 자손들이 모두 죄를 받게 되자 그 이듬해(1756)에 다시 사당을 세우라고 特命하였다. 아아! 辛丑(1721) 壬寅(1722)의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 것을 틈타 다른 뜻을 이루어 보려고 임금의 병환을 숨기고 誣獄을 만들어 儲位(世弟의 지위)를 흔들고자 한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天理民彝(人倫)는 거의 滅息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四公이 마음을 함께하여 보좌하고 을 함께 하여 殉國을 하였다. 이에 힘입어 儲位가 마침내 안정이 되어 오늘이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 억만년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어오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皇天에서 혼백이 오르내리는 朝宗들의 보호하고 도와주심에서 힘입은 것이나 四臣을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비록 屈伸(굽힘과 폄)이 있었지만 兩朝(英祖 正祖朝廷)의 찬양과 追崇이 지극하였고 높은 과 굳센 은 해와 별 처럼 빛나게 되었으니, 天道가 심히 밝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사당은 漢江의 아래쪽 露梁의 북쪽으로 京師(서울)와는 10리 떨어져 있다. 사당의 (문빗장)(처마)(마룻대)都城宮闕拱手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四公이 국가를 돕고 지키던 충성과 가깝다. 章甫 尹光厚 · 李泰謙 등이 비석을 세우기로 꾀하고 載純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옛날에 신하로서 나라에 공이 있으면 · 에 새기고 旗常(깃발)에 기록하였던 것은 榮耀(榮光)을 보여주고 久遠하기를 圖謨한 것이다. 지금 우리 聖上(正祖)의 열 줄 되는 敎諭는 광명하고 懇測하여 영원 전해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니 어찌 예사로이 旗常(깃발)에 새긴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이 비석의 첫머리에 실어 임금의 총명한 명령을 밝히노라.

서원을 세운지 회갑(60)이 되는 丙午(정조 10, 1786)에 세우다.

 

사충서원은 노량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염려가 있었고 또 철도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오래 유지할 수도 없었기에 마침내 한강 위쪽인 보광리에 터를 잡아 옛모습 그대로 옮기고 규제를 바꾸는 일은 없었다. 묘정비는 醇庵 吳太史가 글을 지었는데 健陵(正祖)恩綸(은혜로운 교지, 명령)百世聖人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라. 이 또한 그대로 옮겨 세우고 그 좌측면에 이 사실을 附記한다. 생각해보니, 지난 戊辰(고종 5, 1868) 가을 제향에 내가 有司로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이제 6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다시 院長이란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으면서 工事를 주선하게 되니, 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러봄에 감개롭기도 하고 영예롭기도 하다.

비를 세운지 140년만인 丁卯(1927) 8월 일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 좌찬성 원임 규장각 제학 시강원 貳師 閔泳徽는 추기하다.

 

지난 丁卯(1927)本院을 노량에서 보광리로 옮겼는데 경인사변(한국전쟁)을 당하여 祠宇는 포탄으로 파괴되고 域內는 난민들에게 점거 당하여 位牌眞影을 봉안할 곳이 없었으니, 후손과 후학들의 통탄이 갈수록 더 심하여져 여러 사람의 의논으로 중건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옛 터는 팔고 새 터를 잡는데 廣州의 상산곡리로 정하게 되었다. 戊申(1968) 이른 봄에 일을 시작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였다. 士林들이 모두 모여 의식에 따라 봉안을 마쳤는데 庭碑에 있어서는 비록 글자가 닳아 없어진 것이 있었으나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옛 모습을 보존키 위해서이다. 이에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비의 끝부분에 기록하여 院中 故事一端으로 삼노라.

丁卯 後 41(1968) 8월 일에 후학 李完珪는 삼가 글을 기록하다.

忠獻公 從 10세손 金舜東은 삼가 글씨를 쓰다.

 

사충서원묘정비의 한글번역문비(飜譯文碑)

서기 1726년 사충서원이 창건된 뒤 어언 이백육십일년이 흘렀습니다. 네 충신이 보여준 貞忠毅烈宣揚聖學精進鍊磨를 염원하며 세운 서원의 창건 정신은 여전히 푸르디 푸르고 맑디 맑습니다. 사충서원의 건립 취지와 목적은 사충서원 一周甲이 되는 해인 서기 1786년에 세운 사충서원묘정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석은 과천의 노량과 고양의 보광리에 있었던 옛 사충서원의 모습과 역사까지도 기억하는 실로 값진 보배입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이운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고 특히 1950悲劇庚寅動亂 때 입은 彈痕들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은 육안으로 全文을 파악할 수 없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려운 漢文이기 때문에 내용 파악하기 어렵고 특히 신세대들에게 외면당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비문을 수록한 四忠書院誌와 비석의 탑본을 참고하여 완성한 비문 전문과 그 한글번역문을 담은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을 통하여 사충서원의 역사와 창건 정신이 길이 쉽게 전승되기를 바라며 후학과 후손들은 분발하여 서원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서기 2018년 무술년 시월 사단법인 사충서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