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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태실(1999년 6월 30일 발간)의 교정, 보완 -정오표正誤表 및 추가 내용-/2021년 1월 19일

조원교 2021. 1. 19. 02:34

2021년 1월 19일 『조선의 태실?(1999년 6월 30일 발간)의 교정, 보완 사항 -정오표正誤表 및 추가 내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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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9조선의 태실?(1999630일 발간)

교정, 보완 -정오표正誤表 및 추가 내용-

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卷數 p 잘못 수정 교정 修正 校正/추가 내용
1 4   璿源殿 濬源殿
1 4     6)永興 濬源殿: 준원전은 태조대왕이 태어난 마을 옆에 세운 조선왕조의 발상을 기념한 전각,여기에는 태조대왕의 御胎가 묻혀있었는데 이를 태조대왕 5(1396)년에 桓祖大王舊邸(永興 本宮)로 옮기고, 주변의 연못을 메운 뒤 이 전각을 세웠다. 세종대왕 25(1443)년에 태조대왕의 御影을 봉안하였다;영흥군 순녕면 흑석리
1 5 10 추가   10)咸興 本宮正殿:태조대왕의 潛邸이다. 태조와 그 위 四代(四代:穆祖 翼祖 度祖 桓祖大王으로 각각 추존되었음)조상 위패를 모신 정전 등의 건물이 있다. 태조는 上王 때에도 대부분 이 곳에서 거쳐했다. 또 함흥차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함흥군 운전면(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1 24/89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실을 함께 그린 그림 즉 정조 9(1785)년에 그린 태봉 그림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이는 2005년 발행조선 왕실의 여성?(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발행), 2005, 90면 수록.
1 26-29/
130-132
    조원교, 2015710, 성주 단종대왕 태실 역사 바로 잡기,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1 33-35/
137의 첫줄
    정희왕후 탄생 관련 기록 추가.
아래 실록 기록으로 보면 정희왕후 윤씨尹氏가 홍천洪川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홍천현 관내 공작산에 장태藏胎한 것이라고 본다.
<정희왕후의 지문(誌文)에 이르기를---영락(永樂)무술(태종 18, 1418) 11월 정해(丁亥)에 태후(太后)를 홍천(洪川)의 공아公衙에서 낳았다.>성종실록14(1483)612
1 40-43/
138
    <매일신보> 1928910일자, "신설한 표본은 성종의 태봉"
1 44-46/
139-141
    2011720(), 조원교,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태실(胎室)태항아리(胎壺)태지(胎誌),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마한 유민
1 80-83/
158-161
    2015729, 조원교, 조선 경종대왕 태실의 태지와 태항아리 찻기,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1 89-92/ 164     몇차례 탐색하였으나 장조대왕의 태실이 있던 胎峰遺構는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의 여성?(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91면에 수록된 태봉 그림을 통하여 문종대왕 태봉이 명봉사 바로 뒤편에 있고 그 뒤 산줄기 3-4를 거친 곳에 장조대왕의 태실이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1 93-97/ 166-167     2010426, 조원교, (강원도 영월 정조대왕 태실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자원봉사자 역사 탐방 답사 안내 및 그를 위한 글
  130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주 선석산에 주상전하의 태실을 봉안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大君과 여러 亂臣 瑜(금성대군)의 태실이 그 사이에 자리하였고, 法林山魯山君의 태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태실을 옮기고, 금성대군 및 노산군의 태실은 撤去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4(1459)78


위 실록 기록은 성주 법림산에 있던 魯山君으로 降封되었다가 이미 2년전에 세상을 떠난 단종대왕의
1 130-132     2015710(), 조원교, 성주 단종대왕 태실과 사천 인성대군 태실 역사 바로잡기 위하여 작성한 글(1)(2) -경북 성주 가천면 법전리 태봉에 단종 태실이 있었다-(2015710일 등록),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1 111/
173
1 순종대왕 융희황제(순종황제)
1 114/
174
1 영왕 황태자(영왕, 영친왕)
1 117 14 이송된 이송된 후
1 165   고종 34(1899) 고종 36(1899)
1 164 맨 마지막   사도세자의 태실 표석의 탁본이 있음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 3, 2005, 164. 앞면은 景慕宮胎室 뒷면은 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 즉 정조 9(1785)년이다. 탁본 규격은 세로 183.5 가로66.0, 세로 136.9 가로 53.8cm
1 133 3 예안이씨 진성이씨
1 133 도판1 도판1 도판3
1 133 도판3 도판3 도판1
1 169-170     綏嬪朴氏:영조 46(1770)58-순조 22(1822) 1226순조대왕의 후궁,영돈령부사 朴準源(본관 潘南)의 따님, 정조 11(1787)년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혀 이해 2월에 입궁하여 綏嬪에 봉해졌으며 정조 14(1790)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원자(순조)를 낳았고, 정조 17(1793)31일 숙선옹주를 낳았다. 嘉順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수빈은 행실이 착하고 예절에 밝아 칭송을 받았는데 순조 22년에 창경궁 寶慶堂에서 별세하였다. 이어 顯穆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소의 이름을 徽慶園이라 정한 후 양주 배봉산(현 경희대학교)에 장례했다.북부 계동 龍虎營 자리에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시고 景祐宮이라 불렀다. 묘소가 불길하다고 하여 철종 6(1855)년에 양주 順康園 오른쪽에, 다시 철종 14(1864)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광무 5(1901)綏妃로 추존되었으며, 현재 신위는 서울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 내 경우궁에 보안되어 있다.
1 179     <동아일보> 1928822일자, "순종 태실이안, 홍성(洪城)의 태실을 옮겨모셔 19京城에 봉환"
1 195 9 (본관 坡平)  
1 200 2의 설명 계셨다 승하하신 유배당한
1 238-239     <매일신보> 1928910일자, "각지 명산에 뫼시었던 이왕가 선대 태봉이봉"/
<매일신보> 192931일자, "역대의 태옹 서삼릉에 얼음풀리면 곧 착수, 전부 39"
2 17 마지막/152 평원대군 묘지명(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신수 4333)
2 1523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이 평원대군(平 原大君, 1427-1445)의 후사가 되었다.
<평원대군 이림(李琳)의 아내 홍씨(洪氏)가 졸()하였는데, 제안대군 이현(李琄)을 림()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성종실록 14(1483)514
이로 인하여 평원대군의 묘소가 있던 성남시 태평동에 제안대 군의 묘소도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성남 개발 때 경 기도 포천시 소흘읍(당시는 소흘면) 이곡리 산 31-3으로 이장되었다. 제안대군의 묘소도 함께 이장되었으며 위치는 평원대 군 묘소 오른쪽이다.
2 159-160/37-39 2015710(), 조원교, 성주 단종대왕 태실과 사천 인성대군 태실 역사 바로 잡기를 위하여 작성한 글(1)(2) -경북 성주 가천면 법전리 태봉에 단종 태실이 있었다-(2015710일 등록),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2 40면 마지막/
161-162
제안대군 묘지명(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신수 4326)
  40/16222 묘소는 평원대군 묘소가 있던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에 함께 있었다가 성남시 개발 때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당시는 소흘면) 이곡리 산 31-3으로 이장되었다. 평원대군 묘소 오른쪽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이 광해군 5(1613)54일 직전 무렵 제안대군의 후사가 됨
2 53/170-171 정상에 아무 유적이 없다고 하였고 올라가서도 찾지 못한 태비(비석)이 이후 발견되어 소개되었다. 명문은 앞면 王女貞福阿只氏胎室”, 뒷면 弘治二年九月二十九日巳時立성종 20(1489)년이다. 주인공을 알 수 없는데 필자는 신숙공주나 휘숙옹주로 추정하였다.
한편 필자의 추정 이후 누군가 이를 경휘옹주의 태실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慶徽翁主成化 丁未(1487) 10월 초사일생이다. 이 생년월일 기록은 최근 북한에서 흘러나와 국립중앙박물관에 매도신청된 경휘옹주의 백자묘지석<경기도 수원 아무개 소장>에 있고 필자가 확인하여 여기에 발표한다.
2 54/17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카드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중산동에서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장번호 보관 37-38)胎誌石函이 있다. 필자는 이를 서울특별시 은평구 증산동 태봉에서 출토된 것으로 본다. 결과 이 증산동 태봉에는 雙胎가 있었거나, 또는 태실 보수 당시 태지를 再次 만들었다고 본다. 명문:王女阿只氏胎室()成化十二年六/月初八日立石() 규격:28.2*21.8*4.4
2 57/174-175 201838() 조원교, 조선 성종대왕 따님 공신옹주(恭愼翁主) 태지와 태항아리의 조사 보완,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2 57/174-175 공신옹주(1481-1549)에 관하여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 출생년도였다.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에 묘소 위치는 양주 注乙洞(줄동)으로 나오지만 정작 출생년도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9630일 마한유민 등 3명이 집필하여 발간한조선의 태실p.57, p.174에 실린 글에서도 옹주의 출생년도는 남편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1482년생)에 의거하여 1481년으로 추정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필자는 오늘(201838) 공신옹주의 출생년도가 1481년을 알게 되었다. 이는 국립김해박물관에서 20181230일 발간한 책密陽밀양p.259에 실린 공신옹주 백자 묘지석으로 확인하였다. 이 백자 묘지석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유적 지구에서 한백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수습한 유물을 선정하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전시기간: 20111212-2013220)100306가운데 하나이며. 아래는 이를 보도한 연합뉴스 기사이다. 마한유민은 오늘(201838) 처음으로 이 기사를 접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서 남양주 별내유적 발굴성과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백문화재연구원은 2006년 이래 2010년까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덕송리·광전리 일원 123466를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했다. 이곳 별내지구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국민임대주택단지를 조성할 곳이었다. 그 결과 16-18세기 조선시대 무덤 890여 기가 드러났다. 그중에 회를 쓴 회묘(灰墓)는 총 206기였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움무덤인 토광묘였다국립민속박물관은 한백문화재연구원과 함께 경기 남양주시 별내유적 발굴에서 수습한 유물 100306점의 전시회를 열고, 발굴성과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자리를 오는 16일 오전 10시 박물관 대강당에서 마련한다고 12일 밝혔다. 박물관 기증실에서 이미 전시하기 시작해 내년 220일까지 공개하는 이곳 출토 유물 중에는 놀라움을 안겨준 것이 여럿 있다. -중략-

이 별내유적에서는 조선 9대 성종의 장녀인 공신옹주와 남편 한경침 묘가 발굴되기도 했다. 한경침은 바로 한명회의 손자. 공신옹주 묘는 이미 도굴된 상태라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은 수습하지 못했지만 백자를 재료로 쓴 지석(誌石)을 발굴함으로써 그의 구체적인 일생을 복원하는 개가를 올렸다나아가 부부 무덤인데도 남편 한경침 묘는 구조로 볼 때 고려시대 이래 전통적인 무덤인 토광묘인 데 비해 그보다 50년이 지나 죽은 공신옹주 묘는 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무덤 형식의 변화 양상과 관련해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했다.> 연합뉴스 20111212일 김태식 기자 작성


옹주의 묘지석에서 묘소 지명이 楊州 茁洞으로 나온다. 이 지명은청주한씨족보에 실린 注乙洞과 발음이 일치 된다. 줄동인 것이다. 줄동에 있던 묘소가 실전된 것은 아마도 옹주 내외의 자녀 즉 적실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선왕실족보인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서 공주 내외 아래는 무후(無后)이다.
특히 이번 기회로 명확한 출생년도를 알게 되어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태지와 태항아리가 공신옹주의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높아졌다.
    - 이 태지와 태항아리가 묻혀 있었던 태실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산 30번지 태봉(태봉산)임이 최근 밝혀졌다-
이는 아래 두 블로그에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필자가 밝혀내지 못한 것인데 밝혀져 천만다행이고 두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명하며 머리를 숙이는 바이다.
2 60/175 추정 경숙옹주 태지와 같은 명문이 있는 비석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산107-1에 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비 명문은 앞면 王女合歡阿只氏胎室, 뒷면 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이다.
2 60/175 201337, 조원교, 조선 성종대왕 왕녀 합환(추정 경숙옹주) 태지 및 태항아리, 발표 장소, 발표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2 66-67/
178면 맨 마지막 줄
연산군의 세자는 중종반정(연산군 12(1506)92) 직후 형제인 창녕대군, 양평군, 돈수 등과 함께 924일 처형되었다.
2 68/179면 기존 글에서 초록색 부위를 추가 왕자 강수는 아래 실록과 ?선원계보기략?을 통하여 보건데 淑儀李氏의 소생인 양평군이다.?선원계보기략?에는 이름이 으로 등재되어 있다.<그러나 중종실록 원년 924일 기록에서 양평군 이름은 이다> 이 왕자도 연산군의 축출과 함께 변을 당하였다.
연산군의 세자는 중종반정(연산군 12(1506)92) 직후 형제인 창녕대군, 양평군, 돈수 등과 함께 924일 처형되었다. 이 가운데 양평군은 경숙공주의 외아들인 정미수의 집과 어머니의 일가인 이손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반정 당시에는 이손의 집에 있었다. 양평군은 이손을 아비라고도 불렀다. 반정 당일 양평군의 어미 숙의이씨(본관 양성)는 사제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정 날 이손은 반정군이 양평군을 잡으러 올것이라고 예상하고 양평군을 잘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시가 지나면서 유모와 보모들이 반정 소식을 듣고는 양평군을 영해군(세종의 아들 영해군의 손자)의 집으로 숨겼다. 그러나 반정군은 이내 양평군을 찾아내 황해도 수안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반정공신들의 요구를 끝내 막지 못한 중종의 명으로 9249세 나이로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반정 2개월 뒤인 116일 교동에서 사망.
하지만 중종대왕 8(1513)년 그를 자칭한 자가 나타나 물의를 빚었다.
2 70/181-182 201122(), 조원교, 연산군燕山君 왕자 돈수敦壽 태실胎室 및 태지胎誌태항아리 -경기도 광주 원당리 태실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2 74면 도1 맨 끝/1866 복성군 태지 1, 백자태항아리 2점은 20091120일 개인소장가 서상호씨에 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태항아리<높이 43.7cm 8120, 높이 26.2cm 8121>, 태지<21.7×21.0×5.4cm, 8122>
2 74면 도1 맨 끝/1866 201418, 조원교, 조선 중종 왕자 복성군福城君 태항아리胎壺와 태지胎誌(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376; 201712월 이내 조원교,중종 왕자 복성군 태지와 태항아리, 발표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원고.
2 96/20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창대군 태지(11374) 皇明萬曆三十四年(선조 39(1606)三月初五日生大君胎 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卯時藏
2 201-202 永昌大君石製 胎誌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9113일 일본인 天池茂太郞으로 부터 백자태항아리와 동시에 구입한 것이다. 명문은 아래와 같이 2줄로 되었다. 皇明萬曆三十四年三月初五日大君胎/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卯時藏
2 202 2008가평군청 문의에 대한 200893일 조원교의 답변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 115-1번지(114번지)에 있는 비석에 대한 감정 의견을 아래와 같이 발송하였다.
<이 비석에는 앞면에 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立이 뒷면에 皇明萬曆三十...’이란 글씨가 있다. 이 글씨를 통하여 선조 39(1606)년에 세운 비석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석은 비문이나 비석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시대 왕자 또는 왕녀 기타 왕세자의 자녀 등이 태어났을 때 태를 묻으면서 만든 왕실의 태실의 바로 앞에 세웠던 비석이 분명하다.
위를 통하여 볼 때 두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비석은 선조(宣祖)의 왕자였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선조 39(1606)36-광해군 6(1613)210)의 태실을 만들면서 세운 것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大君安胎謄錄(1606)?을 통하여 규명되리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현재 이 비석이 앞 뒷면이 바뀌어 세워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왕실 태실의 비석이 통상 앞면에 태주(胎主: 태의 주인공)의 신분 및 탄생한 날이 기록되고 뒷면에는 태실을 세운 날이 기록된다는 점에서 바라본 추정이다.
이 태실 비석은 근처에 있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공파<月沙公派: 일명 관동파(館洞派)> 종중 산에 있는 소위 태봉(胎峯)에서 이전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 태봉 정상 지표에는 태실의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조원교)>
2 100면과 101면 사이 추가 조원교가 조선의 태실에 발표하지 않은 또 다른 선조 왕녀 태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宣祖大王 王女 정화옹주貞和翁主 胎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128)의 연구
1)태지 명문: 선조 37(1604)-선조 39(1606)
皇明萬曆三十二年二月二十二日生\
王女阿只氏胎\
萬曆三十四年五月二十六日藏
宣祖의 딸 貞和翁主權大恒(1610-1666)에게 인조 8(1630)下嫁하였다. 東昌尉 권대항의 신도비명은 사헌부 장령 許穆이 지었으며 비석은 崇禎戊辰後四十五年壬子(현종 13, 1672)七月에 세워졌다. 이 비문에 정화옹주는 昭敬大王(宣祖) 登遐(등하: 돌아가시다) 四年前甲辰(1604)二月二十一日에 태어났고 다음 갑진년 四年 후인 丁未(현종 8, 1667)九月二十四日에 졸하니 享年 六十四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태지는 정화옹주의 태지인 것이다. 태실의 원 위치는 알 수 없다. 옹주 내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183-2에 있다.
위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자료관리시스템 등에도 등록하였다.
2 102/
2071
박징원(음성박씨, 1625-1690)은 부인과 합장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으며 비문에 옹주는 1619년생으로 나온다. 이씨는 1643418일 왕으로부터 혼수를 받는 기사가 있다. 인조 반정 후 외삼촌 집에 살다가 광해군 사후 광해군 본궁에 살게 하고 전택 노비 등을 내렸다. 이후 1664111일 사망.
2 104면 도6설명문에서 仁興君第一\女有名天啓六年\丙寅七月初三日辰\時生同年閏六月\二十 藏(접시 上底面) 丙右(內底) 163212.23痘疾로 사망,
적색 글씨 부위는 삭제할 것
2 106-107/
209-211
201337, 조원교, 조선 인조대왕 왕자 용성대군 태실<태지(10761) 및 태항아리(10760) 포함>, 발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2 209 <매일신보> 1928819일자, "인조조 왕남 태봉발견, 광주 서방면"
2 116/
217-218
20067, 조원교, 조선 명안공주明安公主 태지 및 백자 태항아리, ?박물관신문? 국립중앙박물관;
2009121(), 조원교, 조선 明安公主 태지 및 태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원고 및 발표
2 124/
224-225
胎誌: 포천군에 소재하는 옹주태실(영조대왕 왕녀 和緩翁主의 태실로 추정)胎碑 명문과 일치하는 胎誌가 국립중앙박물 관(10117)에 소장되어 있다. 19261012朴駿和로 부터 구입, 규격 29*29*2.7cm, 명문은 乾隆八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乾隆八年三月二十六日午時立()
3 59 김유신 태실 국가사적 제414
3 124면 맨 마지막줄 정공권(鄭公權, 1333-1382)은 우왕 2(1376)년에 우왕의 를 경상도 예안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 정당문학을 제수받고 輸聖翊祚功臣에 올랐다.

 

 

 

 

기타 태실 관련 기록
<경상도 진휼사(慶尙道賑恤使) 한치형(韓致亨)이 와서 아뢰기를, ?신은 진휼의 일이 염려되어 밤에도 편히 자지 못합니다. 듣건대 경상도의 한재가 더욱 심하여 건조(乾燥)한 곳이나 습()한 곳이 모두 말라서, 곡식만 타죽는 것이 아니라 채소도 모두 마르고 상수리까지도 열매 맺지 못하여 백성이 먹을 것이 없다 하니, 장차 어떻게 진구(賑救)해야 되겠습니까? 종사관(從事官) 윤간(尹侃)이 지금 안태사(安胎使)로 본도(本道)에 갔으니, 청컨대 일을 마친 뒤에는 그대로 구황(救荒)하는 여러 가지 일을 살펴보게 하고, 그 나머지 종사관 세 사람은 이달 20일 연후에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에 나누어 보내어서 살펴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구황 잡물에 대해서는 수령(守令)이 비록 저축하도록 독려(督勵)하고 있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먼 앞날의 근심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고식(姑息)에만 힘써 모두 먹지 못할 물건들만 저축하여 다만 적간(?)에 대비할 뿐입니다. 신은 청컨대, 종사관으로 하여금 먼저 구황에 따른 비축의 정()하고 거친 것을 살펴서 백성으로 하여금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비축하도록 힘쓰게 하고, 비축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수령의 근만(勤慢)을 핵론()하게 하소서. 그리고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에게 어사(御史)의 직함을 결부(結付)시켜 8월에 내려보내도록 호조(戶曹)에서 이미 전교(傳敎)를 받았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진휼 종사관(賑恤從事官)이 있는데 또 경차관을 두게 되면 역로(驛路)에 폐단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종사관으로 하여금 재해를 살피는 일을 겸하게 하고, 또 종사관의 반종인(伴從人) 중에서 한 사람을 줄여 지공(支供)하는 비용을 덜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16(1485)73
<조강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講讀)하였다. 시독관 유용근(柳庸謹)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여기에 말하기를, 부부가 만남은 생민(生民)의 시초이고 만복(萬福)의 근원이라 하였습니다. 혼인의 예()가 바르고서야 품물(品物)이 수성(遂成)하고 천명(天命)이 완전해집니다. 부부 사이는 지나치게 천근하기 쉬우므로 오륜(五倫)을 서술할 때에 별자(別字)로 칭하였는데, 문왕(文王)의 배필의 도()가 지극하니 이것을 체념(體念)하셔야 합니다.? 하고, 대사간 이성동(李成童)이 아뢰기를,?관저(關雎)의 시는 만고에 제왕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역대의 임금으로서 방탕한 자가 다 여기에서 말미암고, 반목(反目)하는 자가 다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이것이 집을 다스리는 요체이기 때문이며, 예전부터 집이 다스려지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일이 없는 까닭은 인정(人情)이 더욱 쉽게 잃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혼인의 예가 바르고서야 품물이 수성하고 천명이 완전해지는데, 우리 나라는 혼인의 예를 바르게 행하지 않은 지 오래다. 접때 위에서 먼저 정례(正禮)를 행하매 사대부도 조금씩 행하여 가나,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폐단이 고쳐지지 않으면 보탬이 없을 것이다.?하매, 유용근이 아뢰기를,?위에서 먼저 정례를 행하여 성전(盛典)을 예전대로 회복하였으므로 여염에서 즐겨 따라 행하는 자가 있고 애써 행하는 자도 있으나,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풍속은 버릇이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고쳐질 것입니다.?하였다. 대간이 또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근자에 대사헌대사간승지 같은 자리가 비면 외관(外官)을 주의(注擬)합니다. 감사(監司)1() 안에 겨우 그 도의 일을 알고 죄다 알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더구나 반년 안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사람의 생각에도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 하여 혹 근면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뒷폐단이 있으니 상례(常例)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외임(外任)으로서 들어와 대간에 제수되는 것은 자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접때는 마침 인물이 부족하므로 부득이 제수한 것이니, 이것이 뒤에 관례가 될 것은 없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자(李耔)가 아뢰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고생합니다. 일에 관계가 있다면 폐단을 헤아릴 수 없겠으나, 지금 증고사(證考使)()를 묻을 곳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가 내려갈 때에 종사관(從事官)도 많고 따라가는 상지관(相地官)도 한둘씩 되는데 만약에 백성의 집이나 전지(田地)의 집 근처를 지목하면 이를 피하려고 백성이 다들 재산을 기울여서 뇌물을 쓸 것인데, 이것은 올해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니 보내서는 안 됩니다. 대저 풍수(風水)의 설()이란 황당한 것이며, 또 가까운 곳에 어찌 가릴 만한 데가 없기에 반드시 먼곳에서 가려 백성에게 폐해를 끼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말한 것이 지당하다. 증고사는 역시 옛관례를 그대로 좇아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과연 보탬이 없는 일이다. 또 하삼도(下三道)에 왕래하는 것은 더욱 폐단이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가리는 것이 역시 옳으리라.?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원자(元子)의 태봉(胎封)은 가리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 때문에 그 폐단이 그대로 계속되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반드시 집도 없고 전지도 없는 곳에 터를 잡는다면 백성에게도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에서 가릴 만한 곳이 없으면 하삼도에 지리관(地理官)을 보내어 감사와 함께 돌면서 가리게 하는 것도 경솔히 하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하고, 장령(掌令) 권벌(權橃)이 아뢰기를,?지난해 경산(慶山) 땅에 안태(安胎)할 때에 신이 차사원(差使員)으로서 친히 보았습니다. 안태하는 근처는 다 묵히게 하였으므로 그 곁에 집이나 전지를 가진 백성이 모두 울부짖었는데, 안태하고 나서는 다 백성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미리 한계를 정했더라면 백성도 미리 알아서 심하게 소동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피차를 분간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먼저 소요하니, 이것은 매우 부당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풍수의 설은 본디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안태하는 일 역시 관계될 것이 없는 일인데 백성만 소요하게 하니, 먼저 한계를 정하도록 하라.?하매, 유용근이 아뢰기를,?화를 당하고 복을 받으며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데에는 반드시 하늘이 정한 바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다 보탬이 없는 일입니다. 원자라면 오히려 땅을 가려야 하겠으나, 번번이 그렇게 한다면 땅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고, 벌이 아뢰기를,?화복(禍福)의 설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상시 사대부의 집에서는 아들을 낳거나 딸을 낳거나 태는 죄다 불에 태우니, 이것은 화복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예전 관례를 따라 예사로 하는 일인데 과연 보탬이 없으니, 유사(有司)에 물어서 다시 처치할 방법을 생각하도록 해야 하겠다.?하였다.> 중종실록 12(1537)1123
1. <해주에 머물고 있던 왕녀(王女)가 죽었다. 나이 겨우 6세인데 역질(疫疾)로 죽은 것이다. > 선조실록 34(1601)45
2.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 1558-1619)公州安胎使로 간 것이 {梅窓集} 年譜에 수록되어 있음. 필자는 정사신의 계회도를 연구한 바 있다. 조원교, 16세기말(1560년대) 계회도契會圖 신예新例-정사신鄭士信 참여參與 봉산계회도蓬山契會圖6-, ?미술자료美術資料? 61(199811, 국립중앙박물관)
3. 공주 수촌리 지표조사보고서에 실린 지도에 태봉(胎峯)이 있음.
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528) 납석제 태합(胎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