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의 저술 매천야록에서 읽은 충정공 조병세의 기록/2021년 10월 15일
2021년 10월 15일 매천 황현의 저술 매천야록에서 읽은 충정공 조병세의 기록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을사년, 1905년, 광무 9년))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1827.6.2-1905.11.5. 양12.5, 좌의정 등 역임, 시호 충정忠正) 가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일본인들은 조병세를 가두었다가 하루밤을 재우고 석방하였다. 민영환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조병세는 “나도 죽어야 옳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손님이 말렸다. “한갖 죽는 것은 무익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아니요. 내가 지금 죽지 않고, 후에 죽으면, 무슨 면목으로 민영환을 만나겠소.” 그런 다음에 소매 속에서 아편을 꺼내 씹었다. 이용직(李容稙; 1852-1932년)은 조병세의 사위인데, 이 때 옆에 있다가 집으로 싣고 갔으나 얼마 후 절명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의사를 보내 조사하려 했다. 그러자 이용직이 호통을 쳤다. “우리 대한(大韓)의 대신이 나라를 위해 죽었거늘, 네놈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 어찌하여 네놈들은 죽은 후에까지 모욕할 셈이냐?” 하니 그들은 놀라 도망하고 말았다. 조병세 역시 죽으면서 상소문을 남겼으며, 또 각국 공사관에게 보낸 글이 있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이 조병세는 지난번 일본 사신이 협박하여 조약을 맺은 사실을 각 공사들께 알렸으나 끝내 만나 변명하지 못하고 울분이 치밀어,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기로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분께서는 우호를 생각하시어 약소 민족을 불쌍히 여기어 함께 협의하여, 우리 나라의 독립권을 회복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죽더라도 결초보은하겠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기운이 없어 더 못 쓰겠습니다.
또 국민에게 고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조병세는 죽음에 임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고합니다. 아, 강한 이웃이 조약을 억지로 맺고, 적신들이 나라를 팔아 오백 년 이어온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천만 국민이 장차 노예가 되게 되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낫지 오늘날 같은 수치를 당하겠습니까? 이 때야말로 뜻있는 사람들이 피를 뿌리고 충신들이 분개해야 할 때입니다. 조병세는 너무나 복받쳐 힘을 헤아리지 않고 상소를 올려 아뢰었으며, 거적을 깔고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며, 꺼져 가는 국권을 만회하고 위태로운 국민을 구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대세가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써, 위로는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분에게 사과하려 합니다. 그러나 죽으면서도 한이 되는 것은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황제의 근심을 풀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전국의 동포들은 저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고 각기 더욱 충의를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 우리의 독립 기초를 굳건히 하여 오늘날의 부끄러움을 씻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저는 지하에서도 기뻐 날뛰겠습니다. 각자 힘쓰고, 또 힘쓰십시오.
조병세가 재상(宰相)이 되던 날이었다. 임금은 그가 나가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병세는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 후 조병세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곧은 말로 과감히 건의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가 임금을 뜻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일백년 이래로 재상들이, 낮은 벼슬에 있을 때는 모두 쟁쟁한 이름을 남겼으나 일단 재상이 되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조병세 만은 그런 관례를 깨뜨린 것이다.> 황현, 매천야록(1997년 3월 서울금성출판사 발행). pp.208-211
위는 필자가 공로연수(2020년 7월 1일부터-2021년 6월 30일)를 막 시작할 때에 필자의 서가에서 매천야록을 펼친 순간 본 대목이다.
필자는 몇 년전부터 심신이 좋지 않아 책도 거의 읽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 책도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몇 권만 남긴 상태이다. 큰 아이를 위하여 남긴 몇 그림책 중에 평소 존경하던 매천 황현 선생 저술이기에 뽑아 보았는데 위 내용을 만났으니 감개무량이라고 밖에----.
아래에 고종실록에 있는 조병세 선생의 기록 중 순국 기록과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자리한 조병세 선생 묘소 사진 사적비 사진을 수록하여 길이 마음과 정신을 전하고자 한다.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한 번 죽지 못하고 어제 또 구구한 생각을 호소한 것은 대체로 무익하게 다 죽느니 차라리 이 몸이 더 살아서 다 같이 살 계책을 세우고 망해 가는 종묘사직의 운명을 더 이어 나아가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自强)에 있다.’ 하시고, 이어 서로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은 감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역시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인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신들에게 권면하며 신들은 또 어떻게 폐하에게 권면하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은 또한 성상의 뜻이 과연 수성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5명의 적신(賊臣)들에게 한 나라의 정사를 전담하게 해서 신들과 몇 만 백성들을 모조리 죽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들이 여러 번 청한 것은 애초에 폐하께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윤허를 하지 않고 계십니다. 신들이 청하는 것은 폐하께서 쉽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대소 신료들을 대궐 뜰에 소집하고 각각 당면한 급선무에 대해 진달하게 하여 가려 쓴다면 역적을 치고 나라를 보존하는 일이 그 속에서 시행될 것이니, 삼가 살피고 서둘러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말에 대하여 짐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짐의 말에 대해서도 경들 역시 계속 생각하여 묵묵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난국을 타개할 대책은 요컨대 어제 내린 비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면려하여 각기 자신의 일을 맡아서 극복을 도모하는 데 달려 있다. 꼭 대궐 뜰에 불러 모아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1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조 특진관(趙特進官)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하니, 어의(御醫)를 보내서 자리를 떠나지 말고 간병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1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새로운 한일 조약(韓日條約)에 분개해서 약을 먹고 죽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대신의 돈후한 천품과 굳은 지조를 두루 중앙과 지방에 시험하니 명성과 업적이 무수히 드러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모두 그 위풍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졸(卒)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궁내부(宮內府)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사(匠事)는 영선사(營繕司)에서 거행하게 하라. 예식원(禮式院)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정문을 세우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 정경(正卿)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祭文)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며, 모든 관리들은 나아가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특진관조병세의 상에 각종 비단 10필(疋), 무명과 베 각각 5동(同), 돈 1,000환(圜), 쌀 30석(石), 전칠(全㓼) 1두(斗)를 특별히 수송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조 특진관의 상에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자식들을 구휼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이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1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졸(卒)한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는 나라를 근심하여 절개를 지켜 죽었다. 충성과 의리가 모두 완전하니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추증하여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2일
<종1품 이용직(李容稙)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장인인 원임 의정(原任議政) 신 조병세(趙秉世)가 오적을 처단하고 새 조약을 파기하는 일에 대해 유서로 남긴 상소문의 초본이 있어 의리상 차마 없애버릴 수 없어 이에 감히 봉해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이 글을 두고 잘 살펴 결연히 소청을 준허하여,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보전할 계책을 완수하시어 죽은 사람이 유감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 특진관(趙特進官)이 남긴 상소를 보고 더욱 마음이 슬퍼진다.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가 남긴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변이 끝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침내 외국 군대에게 구속을 당하기까지 하여 나라에 거듭 치욕을 입히고서도 이렇듯 모욕을 참고 구차히 연명한 것은 행여 폐하께서 마음을 돌리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백관들의 연명 상소 반열에 서명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논의하는 자들이 죄과를 한층 더 씌우리라는 것을 압니다.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비단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민영환(閔泳煥)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성의가 얕아,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녕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신의 몸을 가지고 젓을 담가 역적들에게 나눠주소서.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아픈 마음이 하늘에 닿아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가 계신 곳을 바라보니 눈물이 샘처럼 솟구쳐 흐를 뿐입니다. 오직 성명께서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여 죽는 사람의 말을 채용해 주신다면 종묘사직의 매우 다행한 일이고 천하의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 하였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과 절개가 매우 가상하니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치제(致祭)하는 의식을 예식원에서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해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42(1905)년 12월 3일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아뢰기를,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1주기(周忌)에 관리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는 일에 대해 이미 주하(奏下)하셨습니다. 조병세의 소상(小祥)이 이번 음력 11월 5일이며 그의 사판(祠版)은 현재 경기의 가평(加平)에 있습니다. 제문은 시강원(侍講院)에서 찬술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를 임명하는 등의 일을 본 도에서 거행하도록 통지하고,민영환의 소상은 같은 달 4일인데 제문은 역시 시강원에서 찬술하며 헌관과 여러 집사는 궁내부(宮內府)에서 임명하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각각 비서감 승(祕書監丞)을 파견하여 치제하되 제문은 내가 친히 찬술하여 내리겠다." 하였다.> 고종실록 43(1906)년 12월 11일
아래는 고종 임금이 예조판서 조병세(고종 26, 1889년 9월 23일 임명)를 동년 10월 7일 우의정에 임명하여 (이후 조병세가 상소를 거듭 올려 벼슬 사직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고종 임금은 여섯번이나 간곡한 하유下諭를 내렸다) 10월 26일 처음으로 소견(召見)한 날의 고종실록 기록이다. 이를 통하여도 고종 임금은 이미 조병세의 충정과 가문의 내력까지 익히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실록에 나오는 이우당은 경종조 노론 사대신인 조태채(趙泰采; 1660-1722년)의 호이다. 목숨을 걸고 종묘 사직을 위하여 상소를 하다 신임사화 때 무고를 입어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어 순절한 조태채는 조병세의 직계 6대조이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를 소견(召見)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전혀 온당치 않기 때문에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 외람되게 전하를 번거롭게 해 드렸지만 비답을 내려 타이른 것이 전에 없이 절절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명을 어기고 맞서는 것을 일삼고 날마다 번거롭게 대응하는 것은 신하의 의분과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비로소 명에 부응하여 전하 앞에 나왔지만 더욱 황송하여 어떻게 아뢸지를 모르겠습니다. 재상의 직책은 나라의 안위와 관계되므로 위에서 어찌 누구에게나 줄 수 있겠으며 아래에서 어찌 누구나 다 받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근심을 맡아야 할 책임이 큰데, 어찌하여 지금 재상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이 미천한 신에게 미치는 것입니까? 신은 대대로 나라의 은덕을 받았으니 무슨 일인들 감히 회피하겠습니까? 그러나 무능하고 못난 사람으로서 일찍이 큰 죄를 짓고 스스로 조심한다는 뜻을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보통 임무를 맡겨도 감히 받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남의 모범이 되고 모두 우러러 보는 자리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신 자신이 전도(顚倒)하여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으니, 백성과 나라가 낭패스러운 처지에 놓이리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얼굴을 들고서 등대(登對)한 것은 오로지 직접 아뢰어서 요행히 면직해 주는 은혜를 받기를 바란 것인데, 총리(總理)에 새로 임명되기에 이르니 명분으로 보아도 감히 바라지 못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이미 명에 응하였으니 당연히 명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모든 벼슬에서 체차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하고 저의 분수를 보전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을 재상으로 선정한 것은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나도 만족하게 생각하고 여론도 흡족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간 일을 끌어내서 의리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꼭 다시는 제기하지 말고 영의정(領議政)과 함께 서로 한마음으로 협력하면서 날마다 정사를 바로잡을 대책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서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크게 기대하는 바이다." 하니,조병세가 아뢰기를, "이처럼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신에게 갑자기 중대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본분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참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 전하께서 어찌하여 신에게 이런 명을 내리는지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더욱 황송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은 지방관으로서 벌써 훌륭한 공적을 세웠으니 이처럼 해 나간다면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니,조병세가 아뢰기를, "대신의 직책은 원래 중대한 것이니 중앙이나 지방에서 두루 쌓은 업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등용하는 데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은 지방관으로서 조금도 성과를 거둔 일이 없으니, 밤낮 생각하여 보아도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운 점이 많습니다. 설사 칭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정승을 임명할 계제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신은 이조에서 옛날에 실패한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잊을 수 없는데, 그것이 한 관직이나 한 가지 사무에 불과해도 오히려 그러한 것입니다. 아무리 허물을 포용하고 씻어주는 전하의 지극한 사랑과 훌륭한 은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론에서 용납하기 어렵고 역사책에 오점을 끼치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네 번의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지나간 일을 하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은 지금 은덕에 감동되고 의리가 두려워서 얼굴 두껍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도우라는 명에 대해서는 더욱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은 경의 집안 선조 이우당(二憂堂)의 충직한 절개를 가지고 있는데 경이 또 나를 섬기게 되었으니 어찌 오늘 크게 기대하지 않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은 무능하고 못나서 조상에게 누를 끼친 일이 많은데 어떻게 감히 조상이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그대로 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고종실록 26(1889)년 10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