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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용부원(用富院)과 관련된다고 추정되는 '富院' 명문이 있는 고려 청자 파편/2021년 10월 27일

조원교 2021. 10. 27. 10:57

20211027일 단양 용부원(用富院)과 관련된다고 추정되는 '富院' 명문이 있는 고려 청자 파편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지난 1995-1999년 조선의 태실을 찾아 전국을 다닐 때인 1997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있는 태봉(胎峯)의 태실(胎室)1) 2) 찾아갔다. 이 날 용부원 마을 분에게 마을 이름이 옛날 역원(驛院)3) 이름(원 이름, 원 터 이름)이 아니냐고 여쭈니 그렇다고 하며 원 터까지도 알려 주셨다. 이 마을은 중앙선의 한 역인 죽령역 근처인데 용부원이란 마을이 대재(죽령)란 고개에 남아 용케도 이어지고 있어 경탄도 하여 보았다.

 

1)이 태실 태봉은 두 번 촬영하였는데 태실은 英祖大王 王女 (12옹주) 和吉翁主胎室임을 확인하였다. 두 번째 날은 지나가다가 촬영하였다.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였다. 중앙고속도로 공사를 한 참 진행하고 있었는데 태봉 정상이 아슬아슬, 태실도 장차 파괴될 것이라 우려되었다. 이 사실과 태봉의 처지를 박물관을 출입하고 있던 저명한 일간지 모 기자에게 간곡하게 전하며 널리 알려지기를 바랬으나 그 유명한 기자는 그냥 웃기만 할 뿐이고 관련 보도는 전혀 없었다. (이 태봉 태실 관련 사진과 글을 아래에 함께 소개하였다.)

 

조선시대 충청도에 역도는 통칭하여 호서로(湖西路)라 하였다. 호서로에는 6개 역도(역로) 즉 충청좌도의 3개 역도, 충청우도의 3개 역도가 있었다. 2)

 

2)우리나라 역원제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정착되었고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대개 30리 마다 하나씩 실치하였다. ()은 공문서 전달, 관물의 수송, 사신 왕래 접대, 공무 여행자 편의 제공, 공무에 사용하는 말 관리 등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이나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중요한 길목(교통상의 요지), 깊은 산속이나 험한 길가에 설치된 편의 시설이다. 과 같은 장소나 역로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진휼이나 빈민구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 역원제도는 고려시대에 전국을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그 시기는 고려 성종 이후라고 추정된다. 역은 고려시대에는 개경이 중심이고 22역도(역로) 525(속역), 조선시대에는 한성(한양)이 중심이고 41역도(역로) 543(속역)이 있었다. 역는 역도(역로) 30리 마다 하나씩 있었다.

원은 역로를 포함한 주요 도로에 있었다. 처음에는 관청에서 운영하였고 이후 반관 반민 형태로 운영하다가 1896년에 사라졌다. 중종 25(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전국에 1210개의 원이 있었는데 이 중 경상도 468, 전라도 245, 충청도 212, 경기도 117개 있었다.

 

 

용부원역은 충청좌도인 충주의 연원역(連原驛,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 중 장림역(長林驛)에 딸렸다. 연원역에는 단월역(丹月驛인산역(仁山驛감원역(坎原驛신풍역(新豊驛안부역(安富驛가흥역(可興驛용안역(用安驛황강역(黃江驛수산역(水山驛장림역·영천역(令泉驛오사역(吾賜驛천남역(泉南驛안음역(安陰驛)으로 편성되었다.

16세기에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군丹陽郡 역원驛院(2) 대한제국기 순종황제 년간(1907-1910)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단양군丹陽郡 능묘陵墓에는 모두 用富院(용부원), 1872년에 그린 ?군현진지도郡縣鎭地圖? 내 단양군지도(3)에는 용부원(龍富院)으로 나오고, 현재는 용부원(龍夫院)으로 표기하고 있다.

 

3)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21(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을 교정 증보하여 중종 25(1530)년에 완성한 지리지이다.

 

용부원 태실과 마을을 다녀온 이후 본 책 안에 실린 도자기(파편 포함) ‘부원이란 명문이 있는 고려 청자 파편 사진(1)을 보았다. 단박에 단양 용부원리의 원터의 용부원과 관련되리라고 판단하였다. 필자의 판단이 맞았다면 이 용부원이란 명문이 있는 고려 청자는 고려시대에 용부원에서 사용하였던 도자기로 제작되었던 것이리라. 그 이후 십여 년도 훨씬 더 지나가고 필자도 망각되기 전에 이 사진 등을 올리며 강호제현의 검토와 질정을 고대하는 바이다.

(도1)‘富院’이란 명문이 있는 고려 청자 파편, 해강도자박물관 소장, 강진, 강진청자자료박물관, ?고려청자 강진으로의 귀향?, 2000년, 도3 전재(轉載), 저경(底徑) 4.1cm
(도3)고종 9(18720에 그린 ?군현진지도郡縣鎭地圖? 내 단양군지도 용부원(龍富院)과 태봉이 그림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용부원 그림 아래에는 단양군 관아로부터 이십리라는 기록이, 태봉 그림 아래에는 영묘옹주장태 즉 영조임금의 옹주의 태를 묻음이라는 기록이 각각 있다.
이주롼 이진훈 조원교,  1999년 6월 30일 초판발행, 조선의 태실 2권, 129, 화길옹주 태실
이주롼 이진훈 조원교,  1999년 6월 30일 초판발행, 조선의 태실 2권, 130, 화길옹주 태실

 

이주롼 이진훈 조원교,  1999년 6월 30일 초판발행, 조선의 태실 2권, 227, 화길옹주 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西三陵胎室, 1999년 7월, 228면 화길옹주 태지 태항아리

 

국립문화재연구소, 西三陵胎室, 1999년 7월, 325면 화길옹주 태항아리 태지 등
국립문화재연구소, 西三陵胎室, 1999년 7월, 324면 화길옹주 태항아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