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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연구 목록(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기 연구 목록)(마한 유민 작성 원고 목록)/2023년 2월 4일 등록

조원교 2023. 2. 4. 12:00

2023년 2월 4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연구 목록(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기 연구 목록)(마한 유민 작성 원고 목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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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연구 목록(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기 연구 목록)(마한 유민 작성 원고 목록)/2023년 2월 4일 등록

 

매우 중요한 논문 자랑스러운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부득불 다시 올립니다. 글에 사진을 안치한 논문의 스캔은 마한 유민 블로그 티스토리에 실려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논문 제목으로 검색을 하시면 나옵니다. 아니면 2009년 9월로도 검색하시면 됩니다.

아래 목록은 관련된 글들입니다.

 
발표 시기 제목 및 관련 내용 등 비고
2009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 사리장엄구에 대한 연구, 󰡔百濟硏究󰡕 49/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 사리기 중 내함은 백제 멸망 이후 300여 년 지난 후백제 때 백제의 전통을 계승하여 만든 도상(형태와 문양)이다. 백제금동대향로와도 기본적으로 같은 도상이다.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1169() 국립중앙박물관 자원봉사자를 위한 심화교육 일환으로
조선 성종과 연산군 자녀 조사 연구강의,
익산 왕궁리 오충석탑 사리장엄구에 관한 연구강의,
장소 교육동 제 1 강의실
국립중앙박물관
20221219 마한 유민 박사학위논문(2016826)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연구>에 실린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리기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기 등/2016826/20221219일 등록 마한 유민
199911 해중신산海中神山에 관한 문헌文獻과 도상圖像 연구硏究, 󰡔미술자료美術資料󰡕 63, pp.1-32.//백제금동대향로가 해중신산 도상이므로 관련 도상 등을 소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200012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에 관한 연구硏究, 󰡔미술자료美術資料󰡕 65//1994년 특별전과 그 이후 작성한 마한 유민의 여러 글들(앞 초록색 논문 등)을 종합하고 교정하여 작성한 논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20066 부여 외리 출토 백제 문양전 연구, 󰡔미술자료󰡕 74호 총 130/ 흔히 산수문전, 산경문전으로 알려진 그림과 용, 봉황, 귀면(도깨비), 연꽃을 그린 그림 등 8종의 벽돌 그림은 백제금동대향로와 같은 이상 세계 즉 해중신산과 그를 구성하는 물상(物像)임을 주장하는 논문이다. 산의 모습, 연화화생산, 삼신산, 능선의 직선문(빗금), , 봉황, 귀면(도깨비), 인물(신선), 폭포 등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2013530()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銀製托盞에 대한 연구, 󰡔東垣 學術論文集󰡕, 14, 2013,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발행, pp.291-321 원고집필/
탁잔의 형태와 그 표면에 그림 문양들은 백제금동대향로의 도상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기에 이를 증명하고 소개하는 논문이다. 같은 구도의 해중신산, 연화화생산, 같은 소재(, 연꽃, , 봉황, 인물(신선), 폭포, 삼신산, 능선의 직선문, 빗금) 표현 등을 집중하여 소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발행
20156 한국의 古代 神山 世界圖像 연구()
- 三國時代까지, 표현 중심으로 -, 󰡔韓國思想文化󰡕 , 78, 27, pp.207-234// 백제금동대향로가 다양한 동물 인물(신선) 그리고 신산을 표현한 도상이므로 이를 신산 세계로 명명하고 관련되는 사례들을 소개하였다.
韓國文化思想學會
20159 한국의 古代 神山 世界圖像 연구()
- 三國時代까지, 표현 중심으로 -, 󰡔韓國思想文化󰡕 , 79, 33, pp.275-307
韓國文化思想學會
2016826() 扶餘 陵山里 出土 百濟金銅大香爐 硏究, 󰡔박사학위논문󰡕
The Study of the Gilt-bronze Incense Burner of Baekje from Neungsan-ri, Buyeo
<총합 476, 분량: 1481(200자 원고지), 사진 780>
(목차, 국문초록 영문초록 일문초록 중문초록 총 14)
(서론 본문 결론 참고문헌 사진목차 부록 총 462)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학박사, 학박 제23,
학위등록번호: 동방대학원대 15학박08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17222()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목: 경주 황남대총 출토 은잔 연구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
2019124 경주 감은사感恩寺 석탑 사리기 맨 위 둥근 고리 형태의 해석 -둥근 고리인 원()은 연꽃(연화)의 가장 간단한 표현이라는 주장-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자료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2020519 부여 외리 출토 백제 문양전文樣塼(산수문전·산경문전) 연구의 보완,馬韓 遺民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 관리시스템: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자료관리시스템; 마한 유민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발견 舍利莊嚴具에 대한 硏究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학예연구관 趙源喬

. 머리말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발견 위치종류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분석(문양도상편년 등)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와 왕궁리 帝釋寺址 탑 사리장엄구의 비교

. 왕궁리탑과 부여 定林寺址 오층석탑익산 彌勒寺址 석탑과의 관계

. 馬韓百濟報德國都邑으로서의 金馬

. 堅萱 출생지와 後百濟 건국

. 맺음말

 

국문 요약

본 연구에서는 1965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하 왕궁리탑)을 수리하는 도중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연대와 제작발원의 주체(공양자)를 다루었다.

왕궁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사리함, 사리병, 金剛經, 금강경을 담은 불경함, 불상, 유리 구슬, 방울, 향목 등인데 필자는 유리 구슬과 방울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는 약 900년경에 제작되었다고 본다. 이 제작 년대는 사리함의 문양과 기형, 불상의 양식, 금강경의 서체 등을 통하여 설정하였다. 이 연대 추정은 그동안 학계에서 밝힌 왕궁리탑 건립 연대 및 그 안에서 발견된 불상의 제작 연대와도 일치된다.

왕궁리탑 사리장엄구는 9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다른 사리장엄구와도 관련되는 면이 있지만 특히 주목되는 바는 다른 사리장엄구와 달리 백제의 전통이 완연하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백제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에 금마(金馬: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 일대, 익산의 옛 지명)에 있었던 馬韓都督府報德國 특히 왕궁리탑 자리에 있었던 왕궁 혹은 사찰, 왕궁리탑 인근의 彌勒寺帝釋寺 등이 중수改塔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계승전파된 것으로 본다.

왕궁리탑 사리장엄구(특히 사리기 및 금강경)는 지금까지 발견된 900년경 사리장엄구 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품격을 보여 준다. 많은 비용과 정성이 투입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국가 최고 세력이 제작발원의 주체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주체를 당시 패망 직전에 놓여 있던 통일신라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泰封이나 高麗의 경우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구태여 많은 비용과 정성을 투입하는 불사를 단행할 여유, 필요도 없었고 상황도 아니었다고 본다.

필자는 왕궁리탑과 그 사리장엄구의 제작발원의 주체(공양자)900년경 왕궁리탑이 속하였던 나라이자 가까운 곳 全州都邑을 두었던 後百濟 왕실, 특히 백제가 金馬山에서 건국되어 600년을 지냈다고까지 말하며 건국의 뿌리를 마한백제의 도읍인 금마에서 찾았으며 백제 마지막 왕 義慈王의 원통함을 풀어준다며 나라를 세운 후백제의 국왕 甄萱(진훤)으로 본다.

진훤은 백제에 대한 懷古復興悔恨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남았을 금마에서 자신의 야망 성취의 방편으로서도 이 불사를 단행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최고의 품격과 기술 특히 금마에 전승되었 백제의 전통도 수용되었으리라고 본다.

 

주제어: 익산 왕궁리(王宮里), 왕궁리 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사리기, 연화화생, 진훤(堅萱), 금마, 마한, 백제, 후백제(890-936)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발견 舍利莊嚴具에 대한 硏究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학예연구관 趙源喬

 

. 머리말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익산 왕궁리 유적: 사적 408)(1)>은 예로부터 馬韓의 왕궁터라고 일컬어져 왔으며 마한 武康王 전설이 담긴 怪石 등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왕궁터에 걸맞지 않을 불교의 대표적 유산인 5층의 석탑(2)이 있어 자연스럽게 이 유적 및 탑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마한백제의 전설과 문헌 기록 그리고 유적이 점철된 이 유적지 안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왕궁리 오층석탑은 1960년대에 이르면 기울어짐이 더욱 뚜렷하여 도괴될 우려가 있었다.(3) 이에 196511월 하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를 해체하여 복원 보수하던 중인 196512월 상순 탑 안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다.

사리장엄구는 탑을 건립하거나 중수할 때 탑 안에 넣는데 이들은 탑의 건립과 보수의 연도건립 주체는 물론이고 학문풍속생활종교사상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되고 있다.

이 논문의 주안점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분석에 있다. 이 분석은 문양도상상징 등을 통하여 진행하며 또 역사 문헌을 결합하여 연대를 추정하고 건립 주체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동시에 이를 통하여 미결 상태인 왕궁리 유적 성격을 규명하는 밑바탕이 되었으면 한다.

이 왕궁리 유적에 있었던 왕조는 하나로 그치지 않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특정 나라의 왕궁터로 이름을 부여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나아가 이곳 사리장엄구가 나온 탑의 이름도 현재까지 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官宮寺’(4)大官宮寺王宮寺명문 와당에서 보듯 하나로 통일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인하여 이 사리장엄구가 나온 탑의 이름은 특정 왕궁이나 사찰 이름 대신 종래와 같이 왕궁리 오층석탑으로 설정하였다.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발견 위치종류

 

왕궁리 유적 안에 있는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발견 장소 및 위치에 대하여는 상세한 보고서가 없다. 다만 당시 탑의 공사 책임자였던 황수영(黃壽永) 쓴 아래 개략적인 내용이 있을 뿐이다.

 

작년 11월 하순에 착공된 이 탑의 해체 작업 중 125일 제1층옥개 上面 중앙의 積心部에서 方形石을 이용하여 그 상면 좌우에 뚫은 二個方孔에서 有蓋金銅函 各一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방형석은 그보다 작은 長方一石으로 덮었고 그 接線剛灰로써 密封되어 있었다.

동쪽 金銅外函內 중앙에는 金製有蓋方盒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 金製蓮花臺座봉오리形栓上下에 갖고있는 녹색 長頸圓低甁이 직립하고 있었다. 서쪽 금동외함내에도 다시 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그안에는 金帶二條로 묶은 純金板經 󰡔佛說金剛般若波羅蜜經󰡕 19매가 들어있었는데 이 순금판경은 各枚 上下折帖式 金具가 마련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 두개의 금동외함내에는 香木片이 들어있었을 뿐 다른 유품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 금동외함이 놓여진 方孔下低 石面에는 각각 塗灰하였고 그위에 大小 각색의 유리제小珠를 실로 엮은 받침이 놓여있었다. 이들의 보존상태는 모두 놀랄만큼 완전하였는데 그중 특히 板經初有遺品으로서 各板 17各行17자의 寫經体 문자는 도드라지게 片面陽刻되어 있어 주목한바 되었다.

그후 해체가 진행되어서 第一塔身部計八石移置됨을 따라 그 중앙부에서 積石刹柱와 그 주위의 土壇內에서 正方形 석조기단이 노출되었는데 이 基壇四隅에는 不等邊 八角高柱形礎石各一 있어 第一塔身四隅石을 받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이 八角隅柱石間에는 長大石數段으로 쌓아 올려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중앙의 찰주를 해체하던 중 1210일 그 최하에 놓인 三方孔이 다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그東孔에서는 청동여래입상(광배 및 대좌 구비) 1구와 靑銅鈴 1北孔에서는 香類로 보이는 黑色遺片 기타 鐵片 1개가 수습되었으나 西孔의 유물만은 일찍이 盜失되어 흙만이 가득이 들어있었다. 이같은 도난은 제일탑신의 서쪽 壁板石이 한때 倒置되어 있었던 사실과 또 이번 조사에서 밝혀진 攪亂의 흔적에서 보아 틀림없을 것인바 다만 중앙의 刹柱形積石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그 상면에 장치된 사리구가 완존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위를 통하여 왕궁리탑 사리장엄구는 1층 옥개 上面과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각각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층 옥개 상면 方形石 중앙에 동쪽과 서쪽에 1개씩 만든 구멍을 내어 동쪽 구멍에는 녹색 유리 사리병과 그를 담은 함이, 서쪽 구멍에는 금제반야바라밀경판과 그를 담은 함이 들어 있었다. 사리병과 금강경은 같이 2중의 함에 넣었는데 이들 모두 내함은 청동에 금을 도금한 金銅製이고 외함은 청동제이나 바깥면은 朱漆을 하였고 안쪽면은 금도금을 하였다. 또한 모두 내함에 향목을 넣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 구멍 바닥에 모두 실에 뀐 유리 구슬을 놓았다. 심초석에는 모두 3개의 구멍을 만들었는데(5) 그 가운데 동쪽에는 청동방울과 금동불입상이, 북쪽에서는 향류로 여겨지는 검은색편과 철편이 있었다. 그러나 서쪽 사리공은 비어 있어 도굴된 것으로 판단하였다.’이다.

따라서 왕궁리탑에서 사리와 불경이 보관된 1층 옥개 상면은 사리장엄구를 안치한 주체부이고 심초석 부위는 비록 法身舍利로 볼 수 있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사리장엄구 안치 장소의 의미는 약하고 오히려 공양구 내지 기타 地鎭具로도 볼 수 있는 물건 안치 장소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단된다.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의 분석(문양도상편년 등)(6)

 

1. 舍利函

 

왕궁리탑 사리함은 내외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6-1, 6-2, 6-3, 6-4) 재질은 내합의 경우 금동, 외함은 청동이다. 외함과 달리 내함을 금동으로 만든 것은 귀중한 사리를 직접 담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또 외함에서 안쪽만 금도금을 한 것도 역시 그곳이 사리를 담은 내함이 직접 닿기 때문이라고 본다.

왕궁리탑 사리함의 기본적인 형태는 방형이다. 이같은 방형 사리함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경주 佛國寺 釋迦塔 사리함 2(7)의성 氷山寺址 사리함남원 석탑 사리함경주 동천동 사리함대구 桐華寺 毘盧庵 삼층석탑 사리함안동 臨河寺址 塼塔址 사리함고려시대에 만든 서산 普願寺址 오층석탑 사리함光州 新龍里 오층석탑 사리함 등이 있다. 따라서 방형 사리함은 통일신라시대 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불국사 석가탑 사리기가 왕궁리탑 사리기 외함과 가장 접근되고 있다. 그러나 석가탑 사리기 표면은 매우 활달한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연화당초문이고, 왕궁리탑 사리기 표면은 매우 간략화된 연꽃 문양이다. 이러한 차이에다가 우리나라 방형 사리기가 통일신라 시대 이후 후대로 갈수록 작아지고 문양 표현도 간략하거나 생략된다는 점에서 볼 때 왕궁리탑 사리기는 석가탑 사리기 보다 나중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판단할 수 있다.

왕궁리탑 사리함 내함 각 면에는 중심문양 즉 주문양으로써 연꽃을 나타냈고 그 여백은 마치 물고기알과도 같은 문양으로 채웠다. 이처럼 사리함 표면에 연화문을 가득 표현한 예는 경주 皇龍寺址 九層木塔址 사리함불국사 석가탑 사리함 외함남원 석탑 사리함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사리함, 조선시대에 만든 보은 法住寺 八相殿 사리기 등이 있다.

왕궁리탑 사리함의 연꽃 문양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연꽃 문양에 비교하여 볼 때 매우 소략하고 또 운동감이 부족하다. 이러한 판단은 앞에 언급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기 표면에 보이는 연꽃이나 연화당초문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왕궁리탑 사리기의 문양이 통일신라시대 9세기 이후 연꽃 문양이나 연화당초문의 표현을 따른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사리기에 연꽃 문양이 많은 이유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불교에서 연꽃을 비롯한 꽃을 공양하는 것을 공양의 으뜸으로 여기는 전통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왕궁리탑 사리함 표면의 연꽃 문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볼 수 있는 현실에서의 연꽃, 단순한 장식문양인 연꽃이 아니다. 이는 연꽃을 통하여 생명이 탄생되는 소위 연화화생의 도상인 것이다. 연화화생을 하는 연꽃은 기운을 전달하고 품고 변화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일정한 모습이 아니다. 매우 다양하고 자유자재의 모습, 즉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왕궁리탑 사리함 각 면의 연꽃 모양도 각기 다른 것이다.

왕궁리탑 사리함 주문양인 연화문은 크게 두가지 형태이다. 하나는 몸체 4면이고 다른 하나는 뚜껑 4면이다. 부언하건대 이들은 외형은 다르나 연화화생에서는 변화하는 같은 연꽃이다.

두가지 형태 가운데 첫 번째는 만개한 큰 연화와 그 양 옆에 연꽃 봉우리의 모습이다. 이들은 중앙의 연꽃에서 좌우로 또 다른 연꽃이 화생하는 모습이다. 결과 각 면 연꽃은 좌우 대칭이고 또 크게 보면 연꽃 3송이 이다.

그런데 이 사리함 내함 뚜껑 4면에 연화화생은 蓮華化生山 도상, 즉 연꽃으로 부터 산이 탄생되는 표현으로 전개되어 있다. 다만 이 연화화생산 도상은 연화와 산이 뚜렷하게 구별될 수 없는 단계이다. 이 사리함의 연화화생산 도상은 백제시대에 만든 부여 외리 출토 문양전 가운데 鳳凰博山文塼(8)博山文塼(9)에 있는 연화화생산 도상과 접근되는 면이 많다.

결과적으로 이 사리함은 사리를 담는 부위 즉 동체가 연꽃이며 그 위 뚜껑은 연꽃에서 장차 산으로 화생되는 도상이다. 따라서 이 도상은 滿開한 연꽃으로 표현한 爐身과 그 위 연꽃에서 화생되는 박산을 나타낸 부여 능산리 출토 百濟金銅大香爐와도(10) 기본적으로 같다. 이들은 모두 연꽃과 산 안에 화생의 기운 또는 화생 그 자체인 빗금 표현을 한 것이다.

건축이나 용기 등에서 상륜공포손잡이귀퉁이 등은 흔히 연꽃연꽃봉우리당초寶珠 문양이나 형태이다. 이는 연화화생과 관련된 것, 胴體를 연꽃으로 여긴 것 또는 동체인 연꽃의 기운이 또 다른 연꽃으로 화생됨을 알려주는 것이다. 왕궁리탑 사리함의 정상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연꽃 모양으로 變改한 것이다. 이처럼 정상을 연꽃 모양 또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나타낸 사리함은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전 남원 석탑 사리함의성 빙산사지 사리함광주 서오층석탑 사리함양주 水鍾寺 삼층석탑 사리함보은 법주사 팔상전 사리기 등이 있다.

왕궁리탑 사리함 내함 동체의 4면 가장자리와 뚜껑 아래 부위에는 듬성듬성 이어진 圓文樣이 있다. 이처럼 원문양이 이어진 문양은 흔히 連珠文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사리기 연주문의 은 가장 간단하게 나타낸 연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 원문양이 사리함에서 주문양 즉 연꽃문양을 구성하는 문양임에서 입증된다. 나아가 주문양과 원문양의 여백에 가득 표현된 마치 물고기 알과도 같은 문양 역시 가장 간단하게 나타낸 연꽃이라고 본다.

이 사리함에서와 같이 주문양인 연꽃과 그 주변에 물고기알 모양의 문양을 가득 채운 표현은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사리함불국사 석가탑 사리함 내함평창 月精寺 팔각구층석탑 금동 향합경주 安鴨池 출토 금동 가위 순천 松廣寺 金剛鈴 청양 道林寺址 삼층석탑 사리함(11)서산 보원사지 사리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문양을 듬성 듬성 배치하였고 주문양의 여백에 물고기 알과도 같은 문양을 나타낸 청양 도림사지 석탑 사리함은 왕궁리탑 사리함과 도상표현 감각제작 시기 등에서 접근되는 면이 많다. 다만 두 사리기에서 주문양은 다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연화화생 도상에서 같은 문양 즉 연꽃이다. 단지 연화화생에서 단계가 다르고 또는 표현 방식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즉 왕궁리탑 사리함의 주문양은 연화화생에서 비교적 완성된 단계의 연꽃 문양이고, 도림사지 탑 사리함의 주문양은 연화화생에서 연꽃과 동격변화된 모습간략하게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 과 당초문이다.

왕궁리탑 사리기의 기형 및 문양 표현은 매우 단순하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에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연꽃 문양의 경우는 매우 단순, 소략하고 운동감이 부족하다. 그러나 내외를 금동제로 제작한 점이나 또 사리함의 경우 기면을 문양으로 채운 것 그리고 뒤에서 언급하듯 이 시기 유례가 드물게 광배를 부착한 불상을 제작한 것 등은 이 사리장엄구 발원, 공양자가 매우 특별한 계층임을 뜻한다고 본다.

 

2. 舍利甁(12)

 

사리를 직접 담는 용기는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에 따라 형태와 재질에서 변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형태의 경우 통일신라시대는 주로 이 많았고, 고려와 조선시대는 이 많았다. 이 가운데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초까지는 많았다. 그 예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칠곡 松林寺 塼塔 사리병경주 불국사 석가탑 사리병, 고려시대에 만든 안성 竹山里 오층석탑광산 신용리 오층석탑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봉화 西洞里 東삼층석탑청도 長淵寺址 東삼층석탑안동 臨河洞 삼층석탑안동 임하사지 전탑지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함양 昇安寺址 삼층석탑순천 桐華寺 삼층석탑공주 新院寺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병이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든 대부분의 녹색 유리사리병 목은 짧다. 이에 비하여 왕궁리탑 것은 유난히 길다. 이는 고려시대에 만든 일부 도자기들과도 닮은 점이다.

왕궁리탑 사리병은 마개를 금으로 연꽃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또 연꽃 대좌 위에 놓게 만들었다. 이는 사리병 나아가 사리 자체를 연꽃으로 나타낸 것을 뜻한다. 특히 사리가 연화대좌 위에 안치한 菩薩과 같이 존엄한 존재, 신앙의 대좌임을 의미한다. 이같이 사리병을 연화대좌에 안치한 사례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가탑 사리함전 남원 석탑 사리함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사리함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사리함, 고려시대에 만든 光州 西오층석탑 사리함金剛山 月出峯 출토 李成桂 발원 사리기를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왕궁리탑 사리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기형과 관련지어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3. 佛經函(13)

 

왕궁리탑 불경함은 왕궁리탑 사리함와 마찬가지로 내외 2중 구성이고 재질도 내함은 금동, 외함은 청동이다. 외함과 달리 내함 재질을 금동으로 하고 외함도 안쪽면에만 금도금을 한 것은 불경을 담거나 불경에 닿는 부위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내함의 뚜껑 중앙에는 사진에서 보듯 손잡이 아래에 연꽃 모양이 있다. 이 연꽃은 왕궁리탑 사리함의 정상에서 설명한 연화화생 도상이다.

표면에 가득 문양을 나타낸 사리함에 비하여 이 불경함 표면에는 정상 연꽃 모양 손잡이 이 외에 어떤 표현이나 장식도 없다. 불경함을 사리함 보다 단순하게 쉽게 제작한 것은 사리와 불경을 동시에 넣었지만 사리를 더 존숭하였던 전통과 관련된다고 본다. 나아가 당시 발원자의 재정적 지원 규모 및 작품에 대한 요구, 지침, 제작에 필요한 시간 그리고 앞 시기보다도 전반적으로 퇴보한 금속공예 思潮 등과도 관련되리라고 본다.

 

4. 佛像(14)

 

불상은 사리장엄구에 포함된 경우 이 불상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사리를 대신한 法身舍利로서 안치될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신앙예배의 대상으로서 안치된 경우라고 본다. 왕궁리탑 불상은 아마도 법신사리로서 안치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金銅製 如來立像인 왕궁리탑 불상은 佛身臺座光背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불신과 대좌는 한 몸으로 주조하였고, 광배는 따로 주조하여 불신에 부착시켰다.

주지하다시피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불상은 비례가 길쭉하고 옷주름은 얇으며 이전은 물론 이후의 불상들 보다 율동적인 면이 강하다. 그런데 왕궁리탑 불상은 8세기 불상들에 비하여 몸도 비대하고 비례도 위축되어 있다. 또한 옷주름과 대좌의 蓮瓣도 매우 형식화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왕궁리탑 불상의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전기에 만든 소형 불상은 전반적으로 왕궁리탑 불상보다도 비례가 위축되고 옷주름이나 세부 표현이 소략한 경우가 많다. 특히 고려시대 소형 불상들에서 광배가 함께 만든 경우가 매우 드물며 또 있다 하더라도 왕궁리탑 불상에 비하면 극히 소략하다. 따라서 왕궁리탑 불상은 적어도 고려시대 전기 불상 보다 앞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왕궁리탑 불상은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의 초기 즉 90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제작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왕궁리탑 불상의 광배에는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 즉 시대를 달리하는 두 양식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백제 양식을 든다면 첫째 길쭉한 연화형으로 만든 것이고, 둘째 그 내부에 頭光身光擧身光을 구획하되 그 구획에서 거신광의 비중을 넓게 잡고 그 안에 화염문寶珠蓮華文을 가장 두드러진 문양으로 삼은 점이다. 다음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든다면 광배의 내부 특히 두광을 당초문양으로 만 채운 점이다. 이처럼 900년경에 만든 이 불상에 백제 양식을 담은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관련하여 왕궁리탑 불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었으며 같은 전북 지역에 있는 전주 西棲鶴洞 석조여래입상 남원 樂洞里 석조여래입상 남원 蓮華寺 석조여래입상 남원 科笠里 석조여래입상 남원 萬福寺址 여래입상 등은 佛身의 비례, 의습, 광배 등이 왕궁리탑 불상과 접근되는 면이 있다. 또한 왕궁리탑 불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고 전북 지역에 있는 완주 鳳林寺址 삼존불 남원 新溪里 마애여래좌상의 경우도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과 달리 백제 7세기 전반에 만든 익산 蓮洞里 석조여래좌상과 광배 및 불상과 상통하는 바가 많다.

따라서 필자는 왕궁리탑 불상을 포함한 이들 불상에는 익산을 포함한 전북 지방에 있었을 백제 양식이 계승된 것으로 본다. 이는 역사지리정서적 측면으로 조명될 부분이라고 보며 이에 대하여는 이 논문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5. 琉璃 구슬(15)

 

법당불상에 장엄하고 공양되는 대표적인 예는 향유리幡蓋 등이다. 이 가운데 탑 안에 유리 구슬을 장엄과 공양으로써 넣는 전통은 우리나라의 경우 백제시대에 만든 부여 왕흥사지목탑지익산 미륵사지 서탑,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경주 九黃洞 寺址 삼층석탑칠곡 송림사 전탑경주 불국사 석가탑안동 임하사지 전탑지와 고려시대에 만든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문경 鳳笙里 석탑 부여 普光寺址 석탑, 조선시대에 만든 예산 修德寺 석탑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들을 통하여 사리장엄구로서의 유리 구슬은 백제, 통일신라시대에는 다량이지만 고려시대부터는 점차 축소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면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궁리탑 유리 구슬은 우리나라 어떤 사리장엄구의 유리 구슬보다도 양이 많고 크기도 균일하다. 이는 매우 정성을 들여 또 높은 기술로서 제작된 것을 뜻한다. 이 가운데 수량에서 보면 백제, 통일신라시대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유리 구슬의 형태와 크기, 수량으로서만 그 제작 시기를 결정하기에는 무리라고 본다. 향후 이 유리 구슬의 성분 분석이나 형태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제작 시기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6. 방울(15)

 

불교에서는 방울 소리가 ·보살을 기쁘게 하거나 중생들을 成佛의 길로 이끄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의 경우 방울이 나온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만든 경주 황룡사지 구층목탑지안동 임하사지 전탑지구례 華嚴寺 西오층석탑 고려시대에 만든 예산 수덕사 탑 등 4예가 있다. 이 가운데 왕궁리탑 방울은 임하사지 전탑지화엄사 서오층석탑 것과 유사하다. 이를 통하여 왕궁리탑 방울은 통일신라시대 내지는 900년경에 만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궁리탑 안에서 나온 청동 방울은 백제 때의 만든 논산 표정리 고분 출토 방울(16)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왕궁리탑 방울의 제작 시기를 형태으로 결정짓기에는 무리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처럼 탑 안에 방울을 넣는 것은 불교의 장엄구 또는 공양 목적 보다는 우리나라에 오래 전부터 전래된 토속 신앙과 더 근접된다고 생각된다. 巫俗에 등장하는 악기와도 같은 것 특히 진단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7. 香木

 

탑에 향목을 넣는 것은 향화공양의 일환이다. 향목이 발견된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불국사 석가탑대구 동화사 金堂庵 서탑, 고려시대에 만든 안성 長命寺 오층석탑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문경 봉생리 석탑부여 無量寺 오층석탑松廣寺 慈靜國師부도원주 永傳寺址 普濟尊者 西塔, 조선시대에 만든 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등이다.

왕궁리탑 향목은 사리함과 金剛經 주위에 모두 넣었다. 따라서 이 탑의 향목은 공양품 가운데 특히 사리와 불경에게 좋은 향기를 드리운다는 목적에서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궁리탑 향목은 사리함이나 금강경과 같은 시기에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8. 金剛般若波羅密經 (17)

 

불경은 부처의 말씀을 담은 경전이다. 나아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기재한 것이다. 따라서 탑 안에 불경을 안치하는 것은 탑 안에 불상 또는 사리를 넣은 것과 그다지 큰 차별이 없는 의식이자 행위였다.

우리나라의 탑에서 불경이 나온 예를 불경과 함께 소개하면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경주 석가탑의 無垢淨光大陀羅尼經구례 화엄사 서삼층석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관련 6종 다라니, 고려시대에 만든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寶篋印陀羅尼經(1007)개성 南溪院址 칠층석탑의 妙法蓮華經예산 수덕사 탑 보협인다라니경 등이다. 그리고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만든 익산 제석사탑에 금강경을 넣었고, 통일신라에 만든 白城山寺 妙吉祥塔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法華經淨名經隨求卽得大自在陁羅尼금강경을 넣었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몇 자료만 가지고 우리나라의 탑 안에 넣은 불경의 보편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기타 자료를 통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많았고, 고려시대에는 거의 넣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金製 왕궁리탑 금강경은 총 19개의 판이며 각판은 경첩으로 연결하여 접고 펼 수 있다. 또한 일종의 책갑이 되는 板帶를 만들어 다 접은 경판을 보관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판을 제외한 모든 판에는 글씨를 17행씩 배치하였고 그 각 행 마다에는 글씨를 17자씩 배치하였다. 이 금강경에 글자를 새긴 방법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였다. 다만 千惠鳳은 금속판에 硬質의 나무로 押捺하였다 추정하였고, 宋日基金紙 즉 금속판의 뒷면에 종이에 쓴 금강경을 뒤집어 붙여 놓고 角筆 또는 木筆로 뒷면에서 눌러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서체는 이 금강경의 제작 연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금강경의 서체는 근본적으로는 楷書이다. 그런데 이 금강경의 해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또 중국 初唐은 물론 그 이전의 서체보다 훨씬 정리된 해서이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武寧王 墓誌(525)와 그 王妃 묘지(529)부여 출토 砂宅智積碑(654)부여 王興寺址 木塔址 출토 사리기2009119일 발견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출토 금동사리발원기(639) 등에 쓰인 글씨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9세기 말에 만든 仲和 3(883)년명 사리기해인사 吉祥塔 塔誌(895) 보령 聖住寺址 朗慧和尙 白月菩光塔碑(890) 하동 雙溪寺 鎭鑑禪師 大功塔碑(887) 구례 화엄사 石製 華嚴經에 있는 서체와 가깝다. 따라서 왕궁리탑의 금강경은 약 900년경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데 왕궁리탑 금강경의 서체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금석문들에서 보는 해서와는 또 다른 측면, 마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출토 금동사리발원기(639)나 사택지적비(654)에서 볼 수 있는 다소 둔탁하고 고졸한 측면이 있다. 이는 어쩌면 백제의 서체가 계승된 것일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관련 학계의 논문을 고대하고자 한다.

한편 宋日基는 왕궁리탑 금강경 구절에는 唐 長慶 2(822, 통일신라 헌덕왕 14)靈幽 법사가 처음으로 潤文한 것으로 알려진 余時-衆生에 이르는 62자가 추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그 제작 시기를 적어도 822년 이전이라고 추정하였다. 필자는 이 견해는 우리나라 금강경의 유통 전래 경로를 오직 중국과 연결지우며 내린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필자는 62자의 윤문이 없는 왕궁리탑의 금강경은 822년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된 금강경의 역사로 바라보고자 한다. 왕궁리탑 금강경의 서체는 이 논문의 다음 단원에서 소개하듯 왕궁리탑의 至近 거리에 있는 백제 제석사탑 안에도 넣었던 금강경 등의 백제 전통이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계승, 변모, 발전, 蘊蓄된 모습일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이를 포함하여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와 제석사탑 사리장엄구와의 관련은 이 논문의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와 왕궁리 帝釋寺址 탑 사리장엄구의 비교

 

백제 武廣王枳慕蜜地 도읍을 옮기고 새로 精舍를 지었는데 때는 貞觀 13己亥 겨울 11월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큰 벼락을 동반한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에 미쳤다. 이 때 佛堂, 칠층 浮屠 그리고 회랑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방이 하나같이 불타 없어졌다. 탑 아래 초석 가운데 여러 종류의 七寶가 있었고 또 부처의 사리, 부처의 사리를 담은 수정병이 들어있었다. 또한 구리로 종이를 만들어 금강반야경을 베꼈는데 이는 나무로 만들고 칠을 칠한 함에 저장하였었다. 초석을 들어내고 열어 보니 모두 소실되었으나 오직 부처의 사리를 담은 병과 반야경을 담은 칠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정병은 안팎이 환하게 보이나 뚜껑을 열 수 없었고 사리는 모두 없어져 어디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대왕이 사리병에 귀의하고 법사 發卽을 청하여 참회한 뒤 병을 열고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안에 갖추어 있는데 밖에서도 6개가 모두 보였다. 이에 대왕 및 여러 궁인들은 더욱 敬信하였고 발즉은 공양을 올렸으며 다시 절을 지어 사리 등을 잘 저장하였다. (18)

 

위 기록에 등장하는 제석사는 왕궁리탑의 동쪽 약 1.5km 지점에 있었으며 지금은 터만 전한다. 그 터에서는 제석사였음을 확인하는 帝釋寺란 명문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19) 특히 이 절터의 중심에는 마치 위 기록을 생생하게 증언이라도 하듯 사리를 안치하였던 거대한 초석이 둘로 갈라진 채 남아 있다.(20-1)(20-2)

그런데 위 639년경에 만든 제석사탑과 사리장엄구 기록은 지척간에 있는 왕궁리탑 및 사리장엄구를 비교하면 아래와 같이 근접되는 바가 있다. 그 첫째는 모두 마한의 궁터 전설이 있는 곳에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익산에서의 마한은 백제의 역사까지를 포괄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은 백제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우리나라 사리장엄구에서 보기 드물게 금강경을 안치한 점이다. 셋째 종이가 아닌 금속에 금강경을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네째, 사리를 병에 안치한 점이다. 이는 200710월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의 사리도 병에 안치하였다는 점과 연결지어 볼 때 어쩌면 백제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21)

따라서 왕궁리탑 사리장엄구는 제석사탑과 그 사리장엄구 나아가 인근에 전하던 백제의 전통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판단은 이 논문의 앞에서 살펴보았듯 왕궁리탑 사리장엄구가 백제금동대향로 및 백제 불상 등과도 연결되는데서도 더욱 뒷받침 된다.

그런데 제석사탑의 경우 사리를 중심 초석에 안치하였지만 왕궁리탑은 1층 옥개 상면과 심초석 두 곳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왕궁리탑에 사리를 두 곳에 안치한 것은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 즉 1층 옥개 상면은 사리를 안치하는 장소가 삼국시대는 주로 심초석 즉 지하였고, 통일신라시대 이후는 점차 탑신 즉 지상이었다라는 추세를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 즉 심초석은 백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본다. 따라서 왕궁리탑은 사리 안치 장소로서도 제석사탑과 상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왕궁리탑의 심초석에 사리를 포함한 장엄구 또는 진단구를 넣은 것은 이 논문의 뒤에서 살펴보듯 900년경 이후 옛 백제 땅에서 많이 조성된 왕궁리탑을 포함한 백제계 석탑 가운데에서도 유일하다. 따라서 900년경에 만든 왕궁리탑 사리장엄구는 제석사탑 사리장엄구를 포함하는 익산의 백제 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 왕궁리탑과 익산 彌勒寺址 석탑(22)부여 定林寺址 오층석탑(23)과의 관계

 

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제작 연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치하는 경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보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왕궁리탑의 건립 연대를 앞서 살펴본 왕궁리탑 사리장엄구와 같이 약 900년경으로 본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미 이 석탑에 대한 몇 연구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90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일시 유행처럼 조성된 소위 백제계 석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이다.

백제계 석탑은 기단이 1층이고 낮으며, 각 층급의 탑신과 옥개 등은 단순하게 한 돌로 구성하기 보다는 여러 돌로 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옥개의 합각선에 두툼한 隅棟이 묘사되었고 대개 3단으로 처리한 옥개 받침은 목조 건축의 공포를 약식화한 수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처마의 끝에서 옥개 받침부에 이르는 길이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이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석탑의 일반적인 경향과 다른 면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백제계 석탑이 백제 멸망 이후 200여 년간 통일신라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약 900년경 전후 시기에 건립되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제계 석탑을 고려의 개국과 함께 등장한 것으로 보면서 그 원인을 정신적문화적으로 백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염원 표출로 본다.

필자는 왕궁리탑은 옥개 모습과 처마 끝의 反轉은 가까이 있는 미륵사지 석탑과 유사하지만 크기와 탑신의 傾斜度 屋身의 배치, 기단 높이 등은 먼거리에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접근되는 면이 많다고 본다. 이것은 왕궁리탑을 만들 때 대부분 당시 석탑 들이 규모가 축소되고 있던 경향 그리고 미륵사지 석탑이 크고 복잡하여 쉽게 모방할 수 없었던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왕궁리탑은 900년경 이 탑 부근에 都邑을 삼았던 후백제의 왕 甄萱 백제 멸망의 치욕어린 글이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며 臥薪嘗膽의 의지 피력으로서 건립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도 추정하여 본다.

 

. 馬韓百濟報德國都邑으로서의 金馬

 

왕궁리 유적이 있는 옛 금마 일대는 마한, 백제, 보덕국의 중심지였다. 아래는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문헌들이다.

 

準王이 이에 金馬郡으로 이거하였다.

箕準魏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쪽 금마군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馬韓이라 불렀다. 지금은 익산군이다.

金馬郡: 본래 馬韓國(後朝鮮王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하였다.)으로 백제 시조 온조왕이 이를 병합하니 그 뒤로부터 이름을 金馬渚라 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來屬하였다. 충혜왕 後五(1344)나라 順帝 奇皇后外鄕이므로 올려 益州라 하였다. 미륵산 산성이 있다.(세상에서 箕準이 처음 쌓았기 때문에 箕準城이라고도 전한다.) 또 후조선의 武康王 이 있다.(俗號末通大王이라고 하는데 혹은 백제 武王少名薯童이라 한다.)

雙陵: 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보 되는 곳에 있다. 󰡔高麗史󰡕에는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末通大王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薯童인데 말통은 서동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箕準城: 龍華山의 위에 있다. 俗傳하기를 기준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9백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王宮坪: 군의 치소로부터 동남쪽 5리에 있다. 제석면 龍華山의 남쪽 기슭이 끝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마한 때 朝宮이라고 한다. 옛 터와 성터가 宛然하다. 흙을 포개어 성채를 삼았으며 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밭을 갈 때 와당과 돌이 땅에 펼쳐져 있고 깊이 들어 가도 그대로 있다. 혹 돌출된 돌을 뚫어 일으키면 들어간 땅이 몇 척 가량이다. 1은 돌 4조각으로 늘어놓는데 두 돌이 서로 교차하는 곳은 쪼으고 갈아 묶음으로 삼았다. 돌 아래는 연기에 그을린 것이 남아 있다. 간간이 옥과 노리개 동전 쇠못 같은 것들을 얻는다 한다. 이곳은 궁평으로부터 3리 떨어진 곳이다.

宮坪: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帝石面 利仁里 都順山의 한 지맥이 서남으로 鷹峯을 이룬다. 응봉의 아래에 만든 산이 있는데 높이가 1이며 민간에서는 獨山이라 부른다. 혹은 종각이 있었던 땅이라고도 일컫는다. 산 아래에 궁궐의 터가 있는데 민간에서는 마한 때 內宮이라 전한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단과 섬돌이 남아 있다. 만든 산에는 비석의 대좌돌이 있는데 돌 가운데에는 오목한 곳이 있다. 그 크기를 집과 같다고 이른다.

王宮塔: 궁터의 앞에 있다. 높이 10장이다. 돌을 포갠것이 완연하다. 민간에서는 마한 때 이 탑을 만들었다 전한다. 다만 탑은 곧 佛家가 만든 바이며 마한 때 불교는 아직 동쪽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설에 道詵이 말하기를 완산의 지리가 마치 머뭇거리는 개 모양이므로 여기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누르니 고려 태조가 진훤을 눌러 승리하게 되었다. 탑을 완성한 날 완산의 낮이 삼일이나 어두었다 한다.

왕이 마한을 공략하여 금마군에 도읍하였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韓王이 되니 곧 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 五金寺峯 서쪽에 쌍릉이 있는데 󰡔고려사󰡕後朝鮮 무강왕과 그 의 능이라 하였고 또 箕準城龍華山 위에 있다.

본래 백제 今麻只이다. 무강왕 때 축성하여 別都를 두고 金馬渚라 일컫게 되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마한도독부(五都督府 가운데 하나)를 두고 을 거느리게 하였다. 신라 문무왕 13(673)년에 고구려 宗室 安勝(󰡔新唐書󰡕에서는 安舜)을 이곳에 봉하여 報德王으로 삼았다. 신문왕 4(684)년 보덕국에서의 난리를 討平하였다. 경덕왕 16(757)년 금마군으로 고쳤고(거느린 은 셋인데 沃野紆州野山이다.) 全州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 9(1018)년 거듭하여 속하게 하였다. 충선왕 5(1313)(원나라 순제의 황후 奇氏外祖 李公遂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知益州事로 승격시켰다. 本朝 태종 13(1413)년에 익산으로 고쳤다.

城池: 古城(용화산 위에 있다. 백제 무강왕이 쌓은 바 둘래는 39백척이다. 샘과 계곡이 있다. 뒷사람이 기준성이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陵墓 雙陵: 五金寺 서쪽 수백보에 있다. 백제 무강왕 및 왕비의 능이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후조선 무강왕 및 왕비의 능이라 일컫는다. 또 하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고 일컫는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무강왕으로써 기준을 일컫는 것은 고찰을 잘못한 것이다.

熊津 懷古: 들판은 넓디넓은 金馬와 잇닿고, 산봉우리 웅장한 鷄龍 마주해. 서글퍼라 도읍지 자주 옮기어, 나라의 地圖 書籍이 어지럽기만하다.

문무왕 10(670)6월에 고구려 대신 淵淨土의 아들 安勝을 만나 漢城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고 ..(문무)왕은 그를 나라의 서쪽 金馬渚(益山)에 있게 하였다.

문무왕 14(674)9월에 안승으로 보덕왕을 삼았다.(문무왕 10년에 안승을 봉하여 고구려왕을 삼았는데 지금에 再封한 것이다. 보덕이란 말은 歸命(歸依) 등의 말과 같은 것인지 혹은 지명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文明 元年 甲申 고구려의 殘敵(안승의 族子 大文 )報德城하여 하니 신문대왕이 장수를 명하여 이를 토벌할새-이하 생략-

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遺址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한 뒤 大兄 黔牟岑은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여 殘民을 모으고 浿江에 이르러 당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의 史冶島에 이르러 宗室 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小兄 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先王 臧王께서 失道하여 나라를 잃고 이제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藩屛이 되고자 하나이다.”고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은 안승을 금마저에 거하게 하고 報德王하였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은 안승을 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族子 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伏誅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을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將士를 보내어 誅討하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으로 삼았다.

 

다만 이들 문헌에서 마한과 백제가 혼동혼칭되어 있는데 이는 이 두 나라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과정에서 또 금마에서 마한과 백제의 역사가 한 때 점철된 시기가 있었기에 생겼다고 본다.

이 밖에도 옛 금마가 마한백제의 도읍이었음은 익산 지방에 전하는 많은 유적전설을 통하여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왕궁리 유적은 문헌과 전설 그리고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일시적인 수도였던 아니면 別都였던 간에 백제의 궁터로서 거의 확실시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백제시대에 만든 首府上部大官上部와당들은 이곳이 백제 때 궁터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 아래 기록은 大官寺가 왕궁리 궁터 즉 왕궁리 유적이 백제 말기의 역사에서 중심지였음을 전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다.

 

태종 무열왕 8(661)6월에 大官寺井水가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나와 너비 五步가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

 

필자는 지금 금마 일대에서 전설상 마한의 궁터로 전하는 곳이 오직 왕궁리 유적이 있는 곳 1곳에 그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왕궁리 유적지에 있었던 백제의 궁터는 이전 마한의 궁터를 재활용한 것으로,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고구려의 부흥운동 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일시적이지만 藩國으로서 금마에 세운 報德國의 왕궁도 왕궁리의 백제 궁터를 재활용한 것으로 본다.

부언하건대 금마는 우리나라 역사상 마한과 백제 그리고 보덕국의 중심지였다. 특히 백제의 수복을 목표로 건국한 후백제 진훤은 금마가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사실이 특히 주목되고 수용된 것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는 이 논문의 다음 단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 堅萱 출생지와 後百濟 건국

 

진훤은 상주 加恩縣 사람으로 咸通 8丁亥 태어났다. 본래 李氏인데 후에 으로 씨를 삼았다. 아버지 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었는데 光啓 년간에 沙弗城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했다.

상주 賊帥 阿玆蓋가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태조에게 歸附하였다.

 

후백제를 건국한 진훤은 위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경북 문경에 속한 加恩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진훤이 가은에서 나라를 세우지 않고 武將으로 입신한 지금의 전라도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가 생장지에서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은 아마도 생장지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호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그 생장지는 통일신라 도읍인 지금의 경주로부터 가까워 반역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지역이었음도 관련된다고 본다.

한편 지금의 가은 부근에는 일찍이 신라에 통합되었던 몇 소국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咸昌에 근거지를 둔 古寧伽倻國이고 다른 하나는 상주에 근거지를 둔 沙伐國이다. 물론 이 두 소국은 진훤 당시에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곳에 계속 거주한 사람들은 은연중 신라에 대한 異心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데 그 대표적 주자가 진훤일 수도 있다고 본다.

진훤이 세운 후백제의 영역은 오늘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인데 이는 과거 백제 땅이었다. 이곳에는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어쩔 수없는 원통함을 안고 차별을 받으며 산 백제의 백성들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또 이곳에서는 자연히 백제를 그리워하고 회복시키려는 의지도 강렬하였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9세기 후반 통일신라에서 경주 중심의 중앙 세력은 왕위 쟁탈이 극심하였고 또 관원들은 부정 부패를 자행하였다. 또 각지에서 크고 작은 도적들이 일어났으며 그동안 차별 대접을 받은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의 백성들도 반기를 들었다.

아래 기록에서 보듯 진훤은 백제 의자왕의 분함을 풀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의 야망을 성취할 목적으로 백제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고 또 나라 이름도 백제라 정하였다.

 

󰡔魏志󰡕에 이렇게 말하였다. “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朝鮮王 準은 궁인과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馬韓이라고 했다.” 또 진훤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는 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진훤이 西巡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하였다. 진훤은 인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에게 말하였다. “백제가 나라를 시작한 지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蘇定方을 보내서 수군 13만명이 바다를 건너 오고 신라의 金庾信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黃山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는 당나라 光化 3년이요 신라 孝恭王 4(900)년이다.

 

진훤이 대략 890년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본다. 그 이전 세력이 크게 부상되지 않았을 때의 진훤의 군사적 거점은 신라의 서남부 변방인 武州이다. 특히 889년에 진훤의 관직 명칭을 新羅西面都統 行全州刺史兼 御史中丞上柱國漢南開國公이라 칭하였는데 이 칭호는 진훤에게 전주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듬해인 900년에 무주로부터 전주로 천도한 데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진훤이 전주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무엇보다도 전주가 옛 백제 땅에서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고, 나아가 신라에 대한 반정부적 정서백제에 대한 회고적 정서 등이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게 존속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정서를 파악한 진훤은 전주로 천도하면서 위 글에서와 같이 지금 익산 금마에 있는 金馬山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볼 때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하였다는 것은 일종의 억지 주장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훤의 이 주장은 진훤이 마한과 백제의 수도였던 금마를 역사적, 정서적으로 주시한 것을 뜻한다. 진훤은 백제가 마한의 땅에서 마한을 계승한 나라, 신라보다도 먼저 개국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금마산과도 가까운 곳 완산에 도읍을 정한 자신의 나라와 군대가 백제 의자왕의 분함을 달래줄 수 있고 그동안 차별대우를 받은 백성들도 구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필자는 후백제의 도읍이자 왕궁이 있던 전주의 현재 위치는 󰡔高麗史󰡕․󰡔新增東國輿地勝覽󰡕 등 각종 역사 문헌자료와 전설 등을 통하여 오늘날 전주시라고 본다. 특히 전주시에서도 학술 발굴 조사 결과 전면 40칸에 측면 4칸이나 되는 대규모 건물터를 비롯한 8기의 건물터 8기가 확인되고 또 900년경에 제작된 全州城와당(24) 등이 출토된 지금의 전주시 東固山城은 이미 오래 전부터 후백제의 왕궁터로서 比定되었다.

이 이외에도 진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것은 전주의 주변 북서쪽에 익산, 김제 등에 매우 비옥하고 광대한 평야가 있고, 동남쪽은 방어에 유리한 험준한 산악을 끼고 있다는 점도 감안하였다고 본다. 기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지금의 철원 지역에 자리잡은 후고구려와 자신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한 나주 지역 등을 감안한 것도 있었다고 본다.

 

. 맺음말

 

전라북도 益山馬韓百濟都邑 내지는 中心地였는데 이는 역사, 전설, 유적 등을 통하여 확인 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은 마한의 궁터로 전하던 <益山 王宮里 遺蹟: 사적 408>이다. 이곳에는 오층석탑(국보 289)이 남아 있는데 그 안에서 지난 1965년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그 종류는 사리함, 사리병, 金剛經, 금강경을 담은 불경함, 불상, 유리 구슬, 방울, 향목 등이다.

필자는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가운데 유리 구슬과 방울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는 약 900년경에 제작되었다고 본다. 이 제작 년대는 사리함의 文樣器形, 불상의 양식, 금강경의 서체 등을 통하여 설정하였다. 이 연대 추정은 그동안 학계에서 밝힌 오층석탑의 건립 연대 및 그 안에서 발견된 불상의 제작 연대와도 일치된다.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9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다른 사리장엄구와도 관련되는 면이 있지만 특히 주목되는 바는 다른 사리장엄구와 달리 백제의 전통이 완연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 백제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에 금마에 있었던 馬韓都督府報德國 등을 통하여 또는 왕궁리 유적에 있었던 왕궁이나 사찰 그리고 인근 백제 때 창건한 彌勒寺帝釋寺 등이 통일신라시대 때 중수改塔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계승전파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900년경 이 사리함을 만든 주체 즉 供養者는 백제가 金馬山(金馬는 익산의 옛 이름)에서 건국되어 600년을 지냈다고까지 말하며 건국의 뿌리를 마한과 백제의 도읍인 금마에서 찾았던 後百濟의 왕 甄萱(진훤)으로 본다. 즉 백제 義慈王의 원통함을 풀어준다며 나라를 세운 진훤이 후백제의 도읍인 全州 가까운 이곳에서 佛事를 단행한 것으로 본다.

진훤은 백제에 대한 懷古復興悔恨의 의지, 정서가 가장 강하게 남았을 금마에서 자신의 야망 성취의 방편으로서도 이 불사를 단행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최고의 품격과 기술 특히 금마에 전승되었을 백제의 전통도 수용되었으리라고 본다.

 

 

(1)益山 王宮里 遺蹟

益山市 王宮面 王宮里 王宮, 史蹟 408

馬韓百濟文化硏究所/益山市 2003, 󰡔益山先史古代文化󰡕, 앞그림.

(2)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궁, 8.5m, 國寶 289

益山 彌勒寺址遺物展示館 2005, 󰡔彌勒寺址遺物展示館󰡕, p.32

(3)기울어져가던 王宮里 五層石塔의 모습 斷面圖

(4-1)王宮里 遺蹟 出土 官宮寺銘文 瓦當

國立慶州博物館 2002, 󰡔文字로 본 新羅󰡕, 248.

(4-2)王宮里 遺蹟 出土 官宮寺銘文 瓦當 拓本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992, 󰡔王宮里遺蹟發掘中間報告󰡕, P.27.

(5)王宮里塔 心礎石

모두 3개의 구멍 즉 舍利孔을 만들었다.

황수영 1966, 󰡔考古美術󰡕 7-6, P.7.

(6-1)王宮里塔 舍利莊嚴具

馬韓百濟文化硏究所/益山市, 󰡔益山先史古代 文化󰡕, 앞그림

(6-2)王宮里塔 舍利函

外函 高 10.3cm.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1991, 13(P.41).

(6-3)發見 王宮里塔 舍利函

中央日報社 1985, 󰡔金屬工藝󰡕-韓國-23, p.220.

(6-4)王宮里塔 舍利函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중앙일보사, 󰡔金屬工藝󰡕-韓國-23, 118.

(7)慶州 佛國寺 釋迦塔 舍利函

통일신라 8세기경, 17.5cm, 國立慶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8.

(8)扶餘 外里 出土 文樣塼 가운데 鳳凰博山文塼

백제 7세기경, 29×29×4.3cm 내외.

國立扶餘博物館 所藏.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1972, 󰡔百濟瓦塼圖譜󰡕, 181.

(9)扶餘 外里 出土 文樣塼 가운데 博山文塼

백제 7세기경, 29×29×4.3cm 내외.

國立扶餘博物館 所藏.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百濟瓦塼圖譜󰡕, 180.

(10)扶餘 陵山里 出土 百濟金銅大香爐

백제 7세기경, 61.8cm, 무게() 11.85kg, 國立扶餘博物館 所藏, 國寶 287.

(11)靑陽 道林寺址 三層石塔 舍利函

고려 10세기경, 4.8×4.4×1.3cm, 國立扶餘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50.

(12)王宮里塔 舍利甁

7.7cm,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중앙일보사, 󰡔金屬工藝󰡕-韓國-23, 118.

(13)王宮里塔 佛經函

10.3cm,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13(P.41)

(14-1)王宮里塔 佛像

900년경, 17.4cm,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13(P.44)

(14-1)王宮里塔 佛像

󰡔國寶󰡕-工藝- 1985, 29.

(15)王宮里塔 琉璃 구슬과 靑銅 방울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13(P.44)

(16)論山 表井里 出土 靑銅 방울

백제, 7.1cm, 國立扶餘博物館 所藏.

國立公州博物館 2007, 󰡔2007企劃特別展 鷄龍山󰡕, p.113.

(17-1)王宮里塔 金剛般若波羅密經(19)

117.4×14.8cm.

대한출판문화협회 1993, 󰡔한국의 책문화 특별전-출판인쇄 1300-󰡕, 6.

(17-2)金銅 金剛般若波羅密經

19(1크기 17.4×14.8cm).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13(P.40)

(17-3)金剛般若波羅密經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의 책문화 특별전-출판인쇄 1300-󰡕, 6.

(18)󰡔觀世音應驗記󰡕 가운데 익산 帝釋寺 기록

日本 京都 靑蓮院 所藏.

馬韓百濟文化硏究所/益山市, 󰡔益山先史古代 文化󰡕, p.317.

(19)益山 王宮里 帝釋寺址 出土 帝釋寺銘文 瓦當 拓本

國立公州博物館 所藏.

忠南大學校, 󰡔百濟硏究󰡕 4(1973), 1.

(20-1)益山 王宮里 帝釋寺址 木塔址 心礎石

백제 7세기경, 心礎石 160×120×90cm, 舍利孔 61×26.5cm, 깊이 18cm.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宮坪.

國立中央博物館, 󰡔佛舍利莊嚴󰡕, 2.

(20-2)益山 帝釋寺址 木塔址 心礎石 斷面圖

馬韓百濟文化硏究所/益山市, 󰡔益山先史古代 文化󰡕, P.366.

(21)扶餘 王興寺址 木塔址舍利器

백제 威德王 24(577),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출토,

外函 靑銅製, 內函 銀製, 舍利甁 金製.

(22)益山 彌勒寺址 石塔

백제 7세기경,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14.24m, 국보 11.

馬韓百濟文化硏究所/益山市, 󰡔益山先史古代 文化󰡕, 앞그림.

(23)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백제 7세기경,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8.33m, 국보 9.

󰡔彌勒寺址遺物展示館󰡕, P.24.

(24)全州 東固山城 出土 全州城銘文 瓦當

後百濟, 900年頃, 國立全州博物館 所藏.

全州文化院 2000, 󰡔全州文化遺産探求󰡕, P.49.

 

 

 

 

 

 

 

 

 

 

 

 

參考文獻

 

國內 論著

 

󰡔三國史記󰡕.

󰡔三國遺事󰡕.

󰡔帝王韻紀󰡕.

󰡔世宗實錄󰡕 「地理志.

󰡔高麗史節要󰡕

󰡔應制詩註󰡕.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金馬誌󰡕.

󰡔東史綱目󰡕.

󰡔大東地志󰡕.

󰡔與猶堂全書󰡕.

󰡔增補文獻備考󰡕

󰡔全州府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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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壽永 1966, 익산 왕궁리석탑 조사, 󰡔考古美術󰡕, 7-6.

黃壽永 1979, 익산왕궁리오층석탑의 건립연대, 󰡔藝術論文集󰡕 18.

 

 

국외

關野貞 1915, 󰡔朝鮮古蹟圖譜解說󰡕 4, 東京 조선총독부.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東京 近澤書店.

藤島亥治郞 1930, 󰡔朝鮮建築史論󰡕-其三-.

牧田諦亮 1970, 󰡔六朝古逸 觀世音應驗記硏究󰡕, 東京 平樂寺書店.

 

 

 

A Study on Sarira Reliquary founded in Fifth Stone Pagoda of Wanggung-ri in Iksan.

 

Jo, WON Gyo

 

Curator, Dept of history, National Museum of Korea Jo, Won Gyo

 

'It is confirmed by history and a legend that Guemma(金馬), which was the ancient name of Iksan city but now called as a part of Iksan, in Jeonbuk province is an ancient central city of Mahan(馬韓) and Baekje(百濟).

Wanggungri(王宮里 A town of the King's palace) remains (Korean historical relics No. 408), the representative ones of Guemma remains are known as the old palace site of Mahan and Baekje, and their location is about 2km south of Guemma-myeun(金馬面) now.

There is a fifth stone pagoda(五層石塔 as National Treasure No. 289) in Wanggungri, and a bunch of treasure to perish Sarira reliquary(舍利莊嚴具Sarijangeomgu) were founded inside of the pagoda in 1965. A kind of case for Sari, bottle for Sari, Buddist cannon box with Diamond-Sutra (in item), including some Buddhist statue, some marble, and some bell, etc.

I think that the other Sarira reliquary materials except the marble and the bell were made in A.D. about 900 years. The reason for that fixation of the years come from the investigations of the pattern and shape on the case for Sari, the style of Buddhist statue, and the calligraphic style of Diamond-Sutra.

This inference is agreed with the infered years of the five-story stone tower by the academic world and the inferred ones on the years to produce the Buddhist statue in it by researching the style of the statue.

The Sarira reliquary in the fifth stone pagoda has some relation with the other Sarira reliquaries in A.D. about 900, but the special point is that it shows some traditional quality of Baekje exceptionally to the other Sarira cases.

This traditional one of Baekje was shown in the buildings of Mahandodokbu(馬韓都督府, a administrative office governed by Tang dynasty for a time) and Bodeoguk(報德國, a small country founded by Shilla for the royal family of Goguryeo), etc. located in Guemma, in the period of the starting time of the united peninsular by Shilla, and it had transmitted through the peninsula when they reconstruct or remodel palaces or temples in Wanggungri remains including nearby temples - Mireugsa(彌勒寺) and Jeseoksa(帝釋寺), etc.

According to the offerer of the case for Sari, Baekje was founded in the Mt. Guemma and continued for about 600 years, including their opinion that Jinwhon(堅萱), the King of later Baekje(後百濟: 890-936), is the direct offspring of the continuation in spirit.

In short, Jinwhon, the King of later Baekje, seemed to held a Buddhist service to mourn for the King, Euija(義慈王), at the area near Jeonju(全州) which was the capital of the later Kingdom.

Jinwhon seemed to express his will to fulfill his ambition by holding that service in the area of Geumma which had remaining spirits - like the birth from the sacred lotus - to restore the Kingdom, Baekje.

And it seemed that the tradition of Baekje, especially the best quality and skill of the day transmiied to Guemma, had some natural adaption through a bunch of service and procedure over the neglected time.

 

Key words: Wanggung-ri in Iksan, Remains of Wanggung-ri, Fifth stone Pagoda of Wanggung-ri, Sarira reliquary, Sarira case, Birth from lotus flower, Jinhwon(Kyeonhwon), Guemma-myeon, Mahan, Baekje, Later Baekje(890-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