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화암서원의 남촌 이공수 선생을 숭모하며/2016년 2월 23일 외
*이글은 < 익산부원군 문충공 남촌 이공수 선생의 수결 /1987년 마한 유민 확인>과 관련이 되는 글입니다.
*익산 화암서원 주소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산 49-16번지입니다.
2016년 2월23일 일기
익산시청에 전화하니 역사문화재과 이의상(학예연구사)씨가 받는다.처음 통화한 분이다.익산문화유산대관(2015년 발간) 내 화암서원에서 남촌 이공수(李公遂; 1308-1366년) 선생 이름이 빠진 것을 알려주고 시정하라고 하였다.주벽(主壁)이신데 종향(從享)된 소선생들과 이선생 이름 만이 올라 있으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 전화를 한 것이다. 화암서원을 본래 남촌서원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화암이란 이름에서 화는 용화산이다. 암은 바위임과 동시에 바위가 있는 산을 아우르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니면 이공수 선생과 그 학덕을 변함없는 바위·산에 비유한 글자가 아닐까 추정하여 본다.
『익산군지益山郡誌』상권 익산군지편찬회, 단기 4292년 시월 일, 1959년, 권2 6장 / 조명동 소장/ 화산서원을 화암서원보다 먼저 기록에 올린 것은 명백한 실수이자 선현 모독 오만이다. 이보다 앞서 영조 32(1756)년에 편찬한 『금마지金馬志』학교學校에서도 화산서원이 먼저 나온다. 모속(募屬)도 화산서원은 30인, 화암서원은 20인이다. 근처에서 화암서원은 구서원 또는 남촌서원, 화산서원은 신서원으로도 불렀다.
익산 화암동문 글씨 사진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화암동문 글씨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국립중앙박물관유리원판목록집 5, p.287); 이 글씨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63번지와 64-1번지의 사이 바위벽에 새겨 있다. 화암동이란 화암서원이 있는 곳을 동천 즉 신선이 사는 곳 신선 세계로 여기며 지은 이름이다. 화암동문은 그 화암동의 문 즉 입구를 뜻한다.
익산군 지도<해동지도(조선 영조 때 제작한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화암서원을 남촌서원으로 기록하였다.
익산군 지도<해동지도(조선 영조 때 제작한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지도에서 보듯 화암서원은 남촌서원으로도 불리거나 기록되기도 하였다. 사자암이라 기록된 곳은 미륵산(해발 430미터)이다. 이 미륵산의 본래 이름은 용화산인데 그 중 서쪽 최고봉인 장군봉 쪽 아래 평지(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0-1번지)에 미륵사가 백제 무왕 때 들어서자 미륵산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화암서원과 화산서원의 이름들은 모두 용화산의 기슭에 있기 때문에 작명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앞서 금마에 살았던 소동명(蘇東鳴; 1590~1673년, 인조 24, 1646년 진사 입격)은 화암서원(남촌서원)에 와서 아래 시를 지었ㅏ. 창건 초기부터 화암서원은 남촌서원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남촌서원(南村書院)을 제목으로 시를 짓다題南村書院
수재(瘦齋) 소동명(蘇東鳴)
고려 말에 홀로 서시어 獨立麗朝季
위태로운 사직을 기어이 도우셨도다 期扶社稷危
(원나라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폐위당하여 머물던) 임금(공민왕)을 모시고 나라(고려)로 돌아오던 날 扈君還國日
피리를 부시면서 원나라 대도(大都)를 떠나오신 때가 있었다 吹笛出都時
학덕이 높은 삼한의 어르신 宿德三韓老
높은 풍도는 백세토록 우러름받으셧네 高風百世仰
우리들은 크게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오며 吾徒興景慕
이곳에 (영령을 모시고자) 새 사당을 지었습니다 於此起新祠>
이 시는 『금마지金馬志(1755년)』 안 제영(題詠에 실려 있다.
『금마지金馬志(1755년)』 안 제영 ( 題詠 에 실려 있는 남촌서원 ( 南村書院 ) 을 제목으로 시를 짓다 題南村書院
<【향리기언(鄕里記言)】
국자감(國子監) 전주(典酒) *이행검(李行儉; 1225∼1310년)이 일찍이 형부(刑部)의 관리가 되었을 때 **정화원주(貞和院主)가 백성을 노예로 삼으려고 하자 백성이 소송을 걸었다. 형부의 동료가 형세에 핍박을 받아 소송의 정당한 쪽을 패소시키려 하였으나, 공이 죽기를 각오하고 불가하다 고집하였다. 공이 마침 병이 생겨 휴가를 받았는데, 동료는 공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 곧바로 판결하였다. 꿈에 날카로운 검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형부의 관리들을 베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모두 갑자기 병으로 죽었고 공만 홀로 탈이 없었다. 공은 관직이 국자감 전주에 이르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기록한 내용이다.
*이행검: 이공수(1308∼1366년) 선생의 조부이다.
**정화원주(貞和院主):정신부주(貞信府主) 왕씨(王氏)이다. 충렬왕(忠烈王)의 원비인 정화원비(貞和院妃)로, 강양군(江陽君) 왕자(王滋)를 낳았다. 충렬왕이 원종(元宗) 15(1274)년 5월에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 제국공주(齊國公主)와 혼인한 뒤로 40여 년을 별궁에서 살았다.
남촌(南村) 이공수(李公遂)는 공민왕 신축년(공민왕 10, 1361년)에 찬성사가 되었다. 이때 *사적(沙賊)이 이미 물러나 개경(開京)을 새로 창건하였는데, 공은 재능을 살피고 일을 헤아려 조정에 폐정이 없었다. 성현(聖賢)과 스승을 제사하고 학생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여 내외의 학교들이 모두 넉넉해졌으며 예절 풍속을 인도하고 인재를 양육하였으니, 무예를 버리고 문예를 익히며 말을 쉬게 하고 도를 논하는 의리에 대해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계묘년(1363) 원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성균관을 짓는 공역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황제가 하사한 황금 허리띠를 풀어 비용에 보탰다. 목은 이색이 지은 묘지명(墓誌銘) 내용이다.
*사적(沙賊):이른바 ‘홍건적의 난’의 수괴 이름이다. 원(元)나라 말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수령이 사유(沙劉)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원나라의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 지역)를 함락시키고 요동을 거쳐서 고려에 침입하여 송도까지 함락하였으나, 최후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등 세 원수에게 섬멸당하였다.
유학(儒學)에 공이 있으니,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야 마땅하다. 남촌 이공수가 계묘년(1363년)에 어가를 맞이하여 개경에 돌아왔다. 간신 최유(崔濡)가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20을 받들며 **권행(權倖)에게 빌붙어 현릉(玄陵 공민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는데, 황제의 명을 받아 장차 실행하려 하였다. 공민왕이 공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가지고 원(元)나라에 가도록 하였는데, 서경(西京)에 이르러 태조의 원묘(原廟)에 나아가 재배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복위되지 않으면 신 이공수는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대도(大都)에 이르자 황후와 황태자의 ***교로(郊勞)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奇氏)는 곧 이씨의 외손이었다. 황태자가 황제의 명으로 공을 불러 함께 만수산(萬壽山)의 광한전(廣寒殿)에 올랐다. 태자가 건물 편액에 쓰인 ‘인지(仁智)’의 뜻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지(智)입니다. 제왕은 이 두 글자로써 세상을 다스리면 만세 동안 태평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광한전으로 들어가 금과 옥으로 장식된 기둥을 가리키며 태자가 또 말하기를 “노인께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보배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제왕이 인정(仁政)을 일으켜 베풀면 사는 집이 비록 썩은 나무일지라도 견고한 금옥으로 만든 집과 같고, 그렇지 않으면 견고한 금석의 집이라도 도리어 썩은 나무 집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광한전을 나와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 첨사(詹事)가 서서 비파를 탔는데, 태자가 그 비파를 취하여 탔지만 곡조가 연주되지 않았다. 이에 포기하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연습하지 않아서 잊었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즉시 꿇어앉아 말하기를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거문고 곡조 한두 곡을 잊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태액지(太液池)의 배 위에 있었는데, 태자가 공의 말을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본디 이 노인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의 외가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목은 이색이 기록한 내용이다.
*덕흥군(德興君):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왕혜(王譓)로 원나라 순제(順帝)에게서 왕에 책봉되었고, 공민왕 때 최유(崔濡) 등과 함께 본국에 침입하였으나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게 패하여 원나라로 돌아갔다.
**권행(權倖):권세(權勢)가 크고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신하를 말한다.
***교로(郊勞):교외나 성 밖까지 마중을 나가서 위로하여 맞아들이는 것이다.
남촌 이공수가 원(原)나라에 있을 때 공민왕이 복위하니, 공이 또한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대도(大都)의 제화문(齊化門)을 나오자 종에게 피리를 불도록 하고,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한 것이 다시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도중에 말이 지치자 종이 화살 하나로 콩 한 다발을 사서 말에게 먹였는데, 공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가난한 백성이 먹을 것을 빼앗느냐?”라고 하고, 면포를 잘라 그 값을 채워 주었다. 여산참(閭山站)에서 사람은 없고 들에 조[粟]가 쌓여 있었는데, 종이 또 가져다 말을 먹였다. 공은 조 한 다발 값이 목면으로 몇 자인지를 물어, 그 값대로 잘라 목면의 양 끝에 사유를 적어 조가 쌓여 있는 가운데 두었다. 종이 말하기를 “말을 가진 사람이 돌아갈 때 반드시 그것을 가져갈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나도 진실로 안다. 하지만 반드시 이렇게 한 뒤라야 내 마음이 편하다.”라고 하였다. 목은 이색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의 내용이다.
남촌 이공수는 깨끗하고 맑으며 삼가고 신중하였는데, 과단성이 있고 강직하여 터럭 하나라도 망녕되이 주고받지 않았으므로 우뚝하여 권세가에게 군색함을 당하지 않았다.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니, 충의가 천하에 소문이 났으며 왕도 그를 후대하였다. 당시에 신돈(辛旽)이 나라를 맡아 공을 매우 시기하였는데, 공도 역시 가득 차면 기우는 이치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덕수현(德水縣) 농장에서 살면서 복건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그곳에서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풍류가 한가롭고 우아하여 조촐한 산야의 흥취를 즐겼다. 공이 병을 얻자, 친척이 부인 김씨에게 말하기를 “왜 부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김씨가 말하기를 “공께서는 평생 동안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첩이 어떻게 감히 그러한 도를 위배하여 공을 속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의 내용이다.>
위 글은 『금마지金馬志(1755년)』 안 향리기언(鄕里記言) 중 남촌 이공수 선생 내용이다. 앞 소동도가 지은 남촌서원을 제목으로 지은 시 내용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2022년 5월 24일; 익산시 춘포면 창평리 엽동 마을 앞을 흐르는 옥룡천에서 엽동(사진 좌측 마을) 미륵산(사진의 가운데 솟은 산, 해발 430미터) 용화산(사진의 왼쪽 산, 해발 342m)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이다. 옥룡천은 금마면 용화산(극히 일부는 미륵산 독점과 다듬재에서도 내려 옴)에서 발원하여 금마면 동고도리 서고도리 사이를 흘러 창뜰(창평), 엽동(엽동 앞에서 부상천扶桑川과 합류), 천서(안내), 쌍정리의 입석(선들, 이곳에서 왕궁천과 합류), 인수리 경유하여 춘포면 용연리에 이르러 만경강으로 들어간다. 미륵산(왼쪽)과 용화산(오른쪽)의 본래 이름은 모르지만 (아마도 미르산, 또는 용산) 어느 때부터인가 두 산 모두 용화산龍華山(약칭 화산華山)이라 불렸다고 전한다(삼국유사, 금마지, 익산지). 백제 무왕 때 미륵사가 창건되며 왼쪽 산은 미륵산이라 달리 불렸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여전히 두 산 모두 용화산으로 불린 바도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562번지)은 사진 오른쪽 용화산의 줄기가 남으로 금마산(해발 115.6m, 일명 건자산)을 거쳐 내려온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고, 사진 오른쪽부터 첫 전봇대와 두 번째 전봇대 사이에 보이는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옥룡천을 정비하기 이전(아마 1990년대)에는 크고 작은 모래톱들과 기어가는 갈대 등이 많은 풀들이 우거진 둔치와 뚝(제방)으로 아름답고 여유있는 곳, 많은 물새들이 철 따라 노닐던 곳, 크고 작은 버드나무들이 즐비하고 갈대꽃이 만발한 곳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움 모두 사라지고 마치 사대강 처럼 정리되어 물만 가득한 곳이 되어 있다.
2015년 10월 28일
(전주이씨 밀성군파 한포재 종가 장남) 이윤환씨에게 나주 泉洞書院 廟庭碑 탁본 필름을 메일로 보냈다.
2008년 10월 29일
어제 이윤환씨에게 보낸 메일이 가지 않았나 보다. 이에 다신 보낸 메일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생략- 서하 이민서 선생, 병산 이관명,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배향되었던 천동서원인데
서하 선생이 主壁이므로 西河祠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그와 유사한 예는
전북 익산 화암서원을 남촌서원이라고 불렸던 것과 같다.
남촌 이공수 선생이 주벽이기 때문입니다.
즉 천동서원에 泉洞祠든 西河祠든 분명 있었던 사당 이름이
어쩨듯 쉽게 서하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불렸고 그것이 서원이름으로 된 것이다.>
2018년 9월 6일 일기
* 이 날 아래 일기는 국립익산박물관 아무개에게 개관 전시관련하여 보낸 메일이다.
언제나 처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네요
조운 제도: 익산시 성당면, 웅포면
이공수 진충귀
임규(독립운동) 후손 전화번호를 알아요.
황화정(신구 전라감사 교대처) , 즉 익산 지역이 전라도 첫 고을임을
유학자 간재 전우 선생 의 묘소가 미륵산 기양리에 있어요
화강암 여산석 대리석
미륵신앙
미륵산 화암동문 바위 각자 사진이 유리건판 우리관에 있습니다.
항일투쟁, 의병 및 독립운동가(김근배 문용기 정동식, 임규, 홍순갑 등)
공간 있다면 이리시(현 익산시)에 대하여 도 소개하세요. 철도, 공단
군산 지역은 군산근대역사관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분이 있어요)
사찰(암자 포함)에서 간행한 불경등도 조사하면 나올 듯합니다.
제목 :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출근하여 보내주신 메일을 받고 자료를 다운 받고 있습니다.
아직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큰 도움 될 듯 합니다.
전시가 온전히 제 힘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 도움과 생각이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지 이런 아이디어 정도이지
나는 ?선생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니
괘념마세요
그러나 이공수 님 진충귀 님 정도는 추진해 볼 만함.
보덕국
2019년 2월 26일 일기
아래는 익산 화암서원을 소개하는 글 중 일부이다. 이 가운데 화영은 남하(南下) 이화영(李華永; 1887-1963년)이라는 어른이신데 어머니로부터 들으신 바 있는 어르신이며 족보를 내가 오래 전에 복사한 바 있다.
<1552년(명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공수(李公遂)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23년(인조 1) 소세량(蘇世良), 소세양(蘇世讓), 이약해(李若海)를 추가배향하고 1719년(숙종 45) 소동도(蘇東道), 소영복(蘇永福), 소광진(蘇光震)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화암서원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뒤편 로상부락 뒤 미륵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삼간의 사당과 그 옆에 강당삼간(이 강당은 남촌리공수 이십일대손 화영(자자환)께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붕괴되었음)이 있으나 주위에 대나무 숲이 무성하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공수(李公遂)는 익주(益州) 사람으로 언부전서(讞部典書) 이행검(李行儉)의 손자이다.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전교부령(典校副令)이 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 지신사(知申事)와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냈다. 김용겸(金用謙)이란 자는 성질이 포악하였는데, 조카인 환관(宦官) 용장(龍藏)으로 인하여 갑자기 대언(代言)에 임명되었다. 용장의 조카인 곽윤정(郭允正) 또한 그의 권세를 빌려 대경(大卿)에 임명되자 김용겸이 시기하여 용장을 설득해서 그를 파직시켰다. 또 용장이 주었던 재산까지 빼앗기자 곽윤정이 고소하여 감찰사(監察司)에서 그를 탄핵하였다. 팔관회(八關會)에서 왕이 풍악을 관람하다가 김용겸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령하였더니이공수가 아뢰기를, “김용겸은 탄핵을 받았으니 조정의 반열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언 등이 〈김용겸의 파직을〉 잠깐 보류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차라리 한 명의 대언을 줄이더라도 간언을 막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녹사(錄事) 김용기(金龍起)가 음죽별감(陰竹別監)이 되어 민(民)의 재물을 많이 거두어 몰래 사용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헌사(憲司)에서 그를 국문하였다. 김용기가 지평(持平) 최안소(崔安沼)에게 말하기를, “너는 옛날 음죽(陰竹)에 있으면서 민에게 거두어들인 것이 매우 심하였는데, 어찌 도둑이 도둑을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김용기를 석방하라고 명령하니이공수가 말하기를, “김용기는 나라를 갉아먹는 좀인데, 지금 그를 석방하면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공민왕(恭愍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었고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에 임명되었다가 사퇴하니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홍건적[紅寇]이 평정되고 나서 다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고 분사(分司)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경도(京都)를 지켰다. 병란을 막 지나서 모든 일이 초창기에 있었는데,이공수가 진심을 다하여 계획을 처리했으므로 조정에 폐정(廢政)이 없었다. 당시 여러 능전직(陵殿直)을 보충하면서 경도에 머물러 있는 재상(宰相)들에게 천거하게 하니 친척들을 많이 천거하였다.이공수는 홀로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명령을 내린 것이 어찌 우리들의 자손·동생·조카들을 위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이공수(李公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