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5일 간행 ,노촌(老村) 선생님과 이문회우(以文會友) >내 조원교 글
<노촌 선생님 떠나시던 날>
2008년 10월 15일 간행 노촌(老村) 선생님과 이문회우(以文會友) 내 조원교 글
<노촌 선생님 떠나시던 날>
2006년 10월 20일(음력 8월 29일)
출근하니 노촌 선생님께서 오전 2시에 작고하셨다는 부고(訃告)가 왔다. 향년 87수(壽)이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년 세월, 어쩌면 그 후로 빈자리를 노촌 선생님께 의지하며 따랐다. 더구나 큰딸 정원(正媛)과 아들 명동(明桐)의 이름도 지어주신 분, 항상 고맙고, 좋으신 분, 넉넉하신 분이 가시다니.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근간 병석에 계셨기에 훨훨 저 세상으로 가시므로 홀가분 하시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남은 우리들은 슬픈 맘만 감돈다. 휴가를 내 서대문 근처 강북삼성병원에 마련한 빈소로 달려 갔다. 모여든 동학들은 망연자실.
노촌 선생님의 태어나신 것과, 평소 말씀하신 몇가지가 생각났다. 옛 충청도 청풍(淸風) 땅이며 지금은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속하는 북노리(北老里)인데 충주댐으로 인하여 수몰된 곳에서 1920년 태어나신 분, 9대에 걸쳐 세거하신지라 선조님들의 호에 마을 이름 노(老)를 딴 분이 몇 분 계신다고 하셨다. 또 충청도 청풍(淸風) 땅이 바로 우암(尤庵: 1607-1689년) 선생의 수제자인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년) 선생께서 사신 곳,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선생의 자손 등이 세거하는 노론의 본고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송강 선생의 자손인 계산(桂山) 정원태(鄭元泰: 1913-1993년) 선생님도 생각났다. 이문학회에서도 강의를 하신 분, 너무나 한문에 박학하신 분, 인격자이신 분, 참으로 뛰어나신 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잠시나마 그 선생님을 뵈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고맙고 감격 그 자체이다. 참으로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고, 아찔한 정선생님이시다.
노촌 선생님의 모든 장례 절차는 이문학회장(以文學會葬)으로 모시며, 그 총책임은 김영복(金榮福) 형님이 맡기로 하셨다.
10월 22일
노촌 선생님께서 오전 10시 30분경 염을 잡수시었다.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평온한, 태산 같으신 모습, 저절로 숙연해진다.
빈소를 지키다가 밤 8시경에 김영복 형님의 명령에 따라 낙원동 이문학회에 가서 내일 그곳에서 있을 노제(路祭)를 위하여 청소, 정리하고 다시 돌아왔다.
전국 각지에서 많이들 문상 오셨다. 노촌 선생님의 종인(宗人), 친지, 후학들 애통, 조문한다. 그중엔 노촌 선생님과 같은 연안이씨(延安李氏) 관동파(館洞派)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 이진훈(李軫勳)도 왔고, 나는 그 중에 역시 관동파인 이효승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은 연안이씨도 이제 학자가 없는 문중이 되었다고 애석해 하신다. 그리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98년)선생과 같은 벽진이씨(碧珍李氏)라는 이종일씨 그리고 노촌 선생님 외손 조용준(趙庸俊)씨 등과 더불어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면서 철야하였다.
10월 23일
새벽 5시경 병원에서 이문학회로 가 윤재환(尹財煥) 우(友)와 함께 노제 제사상에 제물을 진설하였다. 이어 영구차가 도착하니 선생님의 영정을 안아 모셔서 이문학회로 들어가 모두 울먹이며 노제를 지냈다. 이 때 불현듯 아버지 여윈 슬픔, 불효한 아쉬움이 치밀어 올라 슬픈 감정이 더한다. 아마 다른 분들도 노촌 선생님 때문만으로 눈물 흘린 것이 아니리라.
약 7시경에 다시 발인하였다. 영구차는 고속도로 그리고 막 개통한 듯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다 아마 연풍(延豊) 톨게이트인가에서 국도로 빠져나왔다. 연풍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5년경) 선생이 현감을 지낸 곳이라 감회가 깊은 곳이다. 또 험준한 산길을 돌아 이어 597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가니 그래도 나지막한 평야가 보인다. 그러다 보니 창 밖으로 나의 7대조 재종제(再從弟)인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 1751-1831년, 판서) 공의 묘소가 주1) 보인다. 정헌공은 정조 때 제주도 등지에서 28여 년간 유배살이를 당하신 분, 민족을 위하여 오랫동안 영어(囹圄)에 계셨던(1980년 5월 20일, 22년 만에 가석방 됨)
노촌 선생님과도 어떤 인연이 계시던가 이곳에서 또 뵙다니. 정헌공 묘소는 자손이 장단(長湍)에 겨우 몇 집만 있었기 때문에 남북분단으로 돌보지 못하였고 결국 실전되었다가 지난 2002년 1월에 내가 연풍 안부역전(安富驛前)에 묘소가 있다는 족보 기록 등을 통하여 찾아낸 바 있다. 우연하게도 정헌공께서 돌아가신 날이 5월 19일인데 이는 나의 생일날이었다.
이어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내 선권仙拳 마을 곁에 이르러 영구차가 멈추었다. 장지로 가는 길은 버스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들은 한참 동안 기다린 트럭(이장 소유라 한다.)에 선생님의 관을 옮겨 모셨다. 초조하고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느닷없이 마을 사람 한 분이 우리들에게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화를 낸다. 그 분은 자신도 물론 맹인(亡人: 노촌 선생님)을 잘 알지만 생인(喪人)이나 일행들이 이렇게 고약한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상여를 매고 장지로 갈 때 마을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대부분 돌아가게 하는데 무례하게도 마을 한복판에서 관을 노출시켜 트럭에 옮겨 모셨던 것이다. 김영복 형님께서 그 분을 겨우 진정시킨 뒤 우리 일행은 더러는 걸어서 더러는 승용차로 타고 장지로 향하였다. 나와 몇 사람은 관를 모시려고 덜컹거리는 트럭에 올랐는데 내심 상여로 모시지 못하여 송구스러움만 가득하였다.
그런데 이 때부터 상당히 먼 저 산으로 부터, 아니 선생님의 생가이자 고향인 북노리(北老里)에서 온 듯한 낙엽이 하늘 높이 가득히 새떼 모양으로 날아다니는 장관을 보았다. 더구나 그 일부는 추풍낙엽을, 자연의 만상 변화를 선생님께 고하는지, 아니 선생님께서도 이 낙엽처럼 가신 것이지, 선생님 관 위에 내려 앉기도 하였다. 그 낙엽은 나에게는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던 글을 담은 편지, 그러니 관은 잠시나마 책상처럼도 보였다.
장지는 대사리 마을에서 약 700m 가량 떨어진 곳, 선생님께서 생전에 여러번 말씀하시던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곰티골(熊洞)에 있는 선영(先塋)이다. 선영으로 오르는 입구 길 옆에는 노촌 선생님께서 주관하여 세우신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 1660-1711년) 선생의 신도비가 있었다. 선생님의 9대조이신 명암 선생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광주에 계셨는데 노촌 선생께서 이곳으로 천장하셨다고 나직이 알려 주신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신도비를 보니 불현듯 2000년 한식에 전라도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梨洞里)에 세운 선무원종공신 이근매(李근梅) 선생의 신도비가 생각난다. <비문의 초고는 아래에 붙임>
이근매 선생은 조선 정종대왕의 왕자인 덕천군(德泉君)의 5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절하신 분이다. 이근매 선생의 10대손인 이건재(李建宰) 선생의 아들 이선하(李選夏)씨가 나의 직장 선배인 김영원(金英媛) 연구관의 대학동창이므로 그 경로를 통하여 이근매 선생의 신도비문을 짓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이 일을 맡았는데 먼저 선생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내가 한글로 글을 짓고 그를 선생님께서 한문으로 옮기며 명(銘)을 추가하시여 약 2200자 비문을 완성하였다. 이것도 선생님의 역사이므로 장차 그 비석을 찾아가 사진이라도 찍어 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명암 선생님의 신도비가 있는 곳 부터는 경사가 심하고 울퉁불퉁한 산비탈 길이므로 트럭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나는 맨 앞에서 관을 받들었다. 관은 향나무로 만들어 상당한 무게가 나갔는데, 모두들 선생님을 잘 모시려는 일심으로 뭉쳐 약 150m 정도 떨어진 장지로 향하였다.
장지에 도착하니 하홍만(河洪萬) 형이 장비와 인부들을 독려하면서 유택 자리를 마련하고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감격스럽고 반갑기까지 하였다. 하형은 전날에 내려와 대사리 마을 이장과 상의하였고, 이날 아침부터 인부를 7-8명 동원하여 유택 자리를 정비하고 이장집 경우기를 사서 잔디를 날랐다 한다.
약간의 마무리를 하고 또 제사 준비 등을 하는 동안 나는 선생님 선조들의 묘역을 이곳 저곳 찾아 뵈었는데 대부분 전에 선생님께서 여러번 말씀하시던 어르신들이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세우신 묘비를 통하여 이곳의 풍수, 역사 지리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누군가 선생님의 친제(親弟: 휘 칠영(七榮))의 묘소도 알려주었는데 생전에 뵌 분인지라 감회가 새로웠고,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명암 선생 묘소의 오른편에 사시(巳時)에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하관되셨다. 이날 지사(地師)는 2분이 오셨는데 한 분은 노촌 선생님 선영들에 관하여 오래전부터 관여하신 충주에 사시는 분이시고, 다른 한 분은 서울에서 내려간 송성홍이라는 분이시다.
올라 가던 길에서는 천지신명이 노촌선생과 더불어 추풍낙엽을 보내시어 삼라만상을 자각케 하시더니, 학문을 권면하시더니, 또 하관 평토 후 내려오는 길에는 소나기를 보내신다. 가뭄끝에 내린 단비이다. 더구나 그동안 자연에 목마르던, 도시에 저눌린 고달픈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 특히 농부의 배추밭에 단비, 감로(甘露) 그것이다. 마치 큰 선물을 받은 듯 그 비를 맞아도 기쁘다. 더구나 묘역의 중요한 것을 다 치룬 뒤에 강우(降雨)이므로. 그리고 함께 노촌 선생님의 계자 봉훈(芃勳)씨와 외손 용준 씨랑 앞으로 할 일 등을 말하고 걸으니, 노촌 선생님께서 나에게 지친을 보낸 것인가 하는 착각도 하였다. 나는 오늘 잃은 자가 아니라 다시 얻은 자였다.
오늘 이곳에 선생님을 묻고서 돌아가는데 불현듯 서대문구 홍제 1동 356-104에 있었던 노촌수헌(老村壽軒)이 생각난다. 그 노촌수헌은 노촌선생님께서 오래 사시기를 빌면서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년) 선생님께서 쓰신 글씨인데, 헌 집을 헐고 새로 지은 노촌 선생님의 집 벽에 새겼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중국에 여행가셨을 때 명산(아마 황산)에서 헛일삼아 점을 치니 백수를 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하며 선생님도 포함하여 모두다 웃고 좋아라 했는데 이렇게 겨우 87수로 하직하셨다니. 집에 돌아와서도 노촌 선생님 생각으로 울적였다.
<붙임>
宣武原從功臣嘉善大夫訓局都摠管主簿李公之神道碑銘幷序
大韓民國義兵精神宣揚會常任理事長 延安后人 老村 李九榮 謹撰
成均館大學校儒學大學長文學博士 礪山后人 宋河璟 謹書 幷篆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人間의 眞正한 價値있는 芳名은 자신 보다는 남을 위하여 道理로서 精進하고 특히 殺身保國의 精神으로 國難克服에 이바지 할 때 百世토록 發現 稱頌되는 것이다. 龍巳之亂 때에 草介처럼 殉義한 湖南地方에 수많은 愛國 先正들의 꽃다운 生涯는 그 대표적인 例일 것이다.
德泉君 十五代孫 建宰는 各地 宗黨의 和睦을 良謨하고, 諸先塋의 碑碣을 自力으로 세우고 잘 治膳함은 물론, 該博한 詞章과 介潔한 性格으로 全州李氏는 물론 京鄕各地의 士林間에 稱頌이 藉藉한 知友이다. 어느날 來訪하여 말하기를 十代祖이신 宣武原從功臣 근梅公의 碑文을 五代祖인 震開가 泣血書하고 宗人 折衝將軍全羅道兵馬節度使原任別軍職 鍾英이 撰하여 道光丙戌에 六代孫 鍾欽 等이 江華 海石을 마련하여 舊碑를 건립하였으나, 風雨로 文字가 날로 磨滅됨이 심하고 또 지난날 倭政 때 恐怖心으로 인해 묘소 앞길을 지내다니기를 꺼리던 倭人들이 銃을 亂射하여 毁損된 바도 있어 淸財를 들여 再建코자 碑文을 청하였다. 不文 非才한 나였지만 原從功臣의 散華한 魂魄을 기리고 또 子孫의 至極한 孝誠에 感動되어 차마 拒絶할 수 없었다.
公의 諱는 근梅, 字는 尙馨, 本貫은 全州이며 璿源의 後裔로서 京師에서 嘉靖 丙午에 출생하였다. 公의 거룩한 先系를 살펴보면, 玄祖 諱 厚生은 定宗大王의 第十男 德泉君으로 封해지시고 階는 正義大夫에 贈諡積德公贈光祿大夫領宗正卿이시고,高祖 諱 孝誠은 雲水君에 封해지셨고 中廟朝에 錄靖國勳하고 階는 興祿大夫하였고, 曾祖 諱 轍은 益和守에 봉해졌고 階는 明善大夫하고, 祖 諱 調壽는 字가 德裕 號는 誠菴이며 江陵副守에 封해졌고 階는 彰善大夫하였는바 江陵莅職時에 愛民如子하고 惆窮恤人하며 興學勸農하여 治績이 大著하였다.考의 諱는 希枰 官은 都正에 階는 正德大夫에 이르렀는 바, 天性이 淸介하고 識鑑이 卓異하며 士禍의 將起를 預知하고 嘉靖年間에 婁徵不起하다가 南駕로 因하여 官途洋洋하여 高官大爵에 陞進할 수 있었으나 草野에 묻혀 安貧樂道로 一貫하고자 全羅道 樂安梨洞에 嘉靖 己酉年頃에 移住하였으니 바로 入鄕祖이시다. 落鄕後 璿源의 後裔로서 보기 드물게 鄕民들을 淸貧節儉과 德業相勸으로 對하고 晝耕夜讀과 農桑을 勸勵하니 그 稱頌함이 藉藉하였고 及其也 洞里 어귀에 下馬碑를 세워 모범됨을 禮慶하였다. 妣는 新昌孟氏로 監役輔祐의 따님이며 淑夫人에 封해졌다. 幽閒柔順에 無違婦德하였다. 明廟 丙子에 공을 낳았고, 嘉靖己酉에 次廷立을 두었는데 落鄕 당시 廷立은 胎中에 있었다.
公은 生有異質하여 純篤剛方하고 忠厚退讓하며 聰明俊敏하고 汎愛仁親하며 智略過人하고 無比膽力을 지녀 일찍부터 璿源 虎班의 바탕을 받았다고들 일컬어졌다.그러나 儒業에도 硏磨精進하여 文武兼備의 才樑이기도 하였다.長成하여 萬曆年間에 武科에 及第하여 訓練院主簿를 지냈으나 先考를 닮아 功名보다는 林泉에 더 뜻을 두었다. 龍巳之亂이 발발하여 疆土가 焦土化되고,宣廟는 松京 箕城을 거쳐 龍灣에 까지 蒙塵하니 宗廟社稷은 風前燈火요 百尺竿頭의 形勢였다. 이에 公은 弟 廷立을 비롯한 樂安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倡義를 主唱하였는데 璿源의 後裔이고 前任官이기에 그 麾下 북소리는 더욱 널리 퍼져갔고, 各地에서 竭誠盡忠의 一念으로 虎口倭陣을 如踏無人하여 數千級을 屠戮하는 赫赫한 功跡
을 남겼다. 晉州는 慶尙右道의 首邑으로서 무너진 慶尙左道를 收復할 事實上의 慶尙監營이고 國倉인 全羅道로 통하는 交通上의 要地였다. 萬曆 壬辰 十月에 倭兵이 晉州城을 공격할 때 경상도 官兵과 義兵이 그리고 湖南의 義兵 등이 合勢하여 城內外에서 總蹶起應戰하여 死鬪를 벌려 守城한 것도 그 때문이다. 壬辰 十月에 慘敗한 倭軍은 敗戰을 復讐挽回하고자 癸巳 五月二十日 島酋 豊臣秀吉의 命令을 받아 加藤淸正, 小西行長, 宇喜多秀家 등의 麾下 大軍을 動員하여 진주를 二十二日 再攻하는데 당시 城內에는 倡義使 金文烈公千鎰 麾下 湖南의 熱血 將卒들이 雲集되었는데,公도 창의사의 副將이 되어 入城하였다. 당시 晉州城은 嶺南官兵과 義兵들이 守城을 抛棄하고 退却한 곳이다. 劣惡한 武器에다가 官兵도 없는 他鄕 湖南 義兵들이 主軸이고, 또 城外 郭再祐 등 嶺南義兵의 應援도 받지 못하는 孤立無援의 地境이었다. 新銳의 武器를 지닌 大軍 倭軍과의 戰鬪는 처음 부터 衆寡不敵이었고, 지난 壬辰年과는 달리 勝算없는 戰鬪였다. 그러나 城이 몇 번 헐리우고 城內 기와 한 조각도, 돌맹이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死力을 다하여 八晝夜를 應戰하다가 倡義使 金文烈公千鎰, 慶尙右兵馬節度使使崔忠毅公慶會, 忠淸兵使黃武愍公進을 비롯한 諸將과 忠卒 三千五百名은 六萬餘名의 진주의 백성과 함께 守護神이 되었다. 公도 忽然히 날아온 彈丸을 맞아 不意에 逝去하였고, 弟 廷立도 兄公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厲聲大戰이다가, 또한 敵彈에 쓰러지니 형공의 享年은 사십팔세였고, 제공의 향년은 사십오세이다. 招魂葬으로 公을 返葬하여 樂安 栗於 笠巖山下에 艮坐로 葬事하니 바로 鄕里 梨洞의 後麓이다.
殉節 뒤 萬曆甲辰 十月에 弟公과 함께 宣武原從功臣 一等에 加贈錄券되어 功跡을 百世에 전했다.그러나 공은 滅私奉公과 先公後私의 精神을 지닌데다가 또 褒賞에 눈을 돌리지 않은 까닭에 後世에 공의 사적은 겨우 樂安邑誌 寶城郡誌 全羅南道史 등에 몇字로서만 전할 뿐인데 이는 實相의 萬分之一일 뿐이다. 配는 密陽朴氏로 監役萬夏의 따님이다.卒後 公의 同原에 雙墳祔右하였다. 소생은 二男이니 장남 應南은 武科에 及第하여 通訓大夫에 이르렀고,차남 哲南도 무과에 등제하여 經歷을 지내고, 응남은 二男을 낳으니 士進과 起發이고,哲南은 一男을 낳으니 信吉로 贈 敦寧府都正에 이르고, 信吉은 三男을 낳으니 長男 仁成이고 次男은 仁謂 三男은 仁壽인데 蔭工曹叅判에 이르고, 인수는 바로 舊碑를 세운 一男 震開를 낳으니 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曾孫이하는 不知其數로 다 記錄하지 못한다.
光緖壬辰에 承旨를 지낸 같은 德泉君裔인 寧齋建昌公이 上訴事件으로 謀陷을 받아 寶城에 流配되었을 때 一年間 梨洞에 留宿하였는데, 공의 忠節을 孝孫들의 忠孝雙全을 稱頌欽慕한 바가 많았다. 一例로 公의 史蹟과 舊碑의 碑銘과 行狀 墓誌를 京鄕 各地의 一家들에게 알렸고, 戰亂風塵으로 傳說로만 전하던 無痕消失된 下馬거리에 下馬碑를 이 마을에 問安 온 守令을 통하여 再建하였던 것이다. 龍巳之亂에 忠武公 李舜臣 將軍의 海戰의 勝捷이나, 나의 祖上 月沙 文忠公 李廷龜께서 壘卵의 危機를 슬기롭게 극복한 外交 등은 歷史에 뚜렷하다. 그러나 그 功跡도 사실은 공과 같은 공적이 숨은 魂魄들의 바탕에서 可能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 碑를 공의 神道에 세우는 것은 國家를 再造한 公의 거룩한 精神과 芳名을 千古에 遺憾없이 전하기를 바라는 微力의 表示이며, 先祖들의 芳名을 아름답게 傳授하는 孝孫의 努力의 證明이니, 이에 아래와 같이 찬양 노래(銘)한다.
지금 구비(舊碑)에 확실하게 보이는 건립인으로는 종손 在陽, 有司이며 七代孫인 宗欽, 등일 뿐이다.
隆熙紀元後 再戊寅 閏五月 立
(위 글은 노촌 이구영 선생님의 하교를 받들어 조원교가 1998년경 지은 초고이다. 그를 큰 변동 없이 노촌 선생님께서 1999년 한문 약 2200자로 완성하고 성균관대학교 송하경(宋河璟) 교수의 글씨로 써져 11월 11일 이건재 선생의 장남인 이선하(李選夏)씨에게 송부되었다. 이듬해 이를 비석에 새겨 한식날 세웠다. 이 비석이 있는 곳은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梨洞里: 배골) 저수집 옆 전주이씨 선산이다.
조선 순조 26(1826)년 처음 세운 이근매 선생의 비석은 석질이 좋지 않고 세월이 오래되어 박락됨이 많은채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비석이 있는 선산 중앙을 통과하여 국도가 개설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평소 위선(爲先)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 10대손 이건재(李建宰) 선생은 근심에 쌓였고 그 도로의 방향을 약간 우회시켜 선영을 지켰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되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단서가 필요한데 우선 생각한 것이 어렴풋하나마 이근매 선생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이라는 점이다. 국가에서 위인의 묘소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단서이므로 그를 찾아 나섰다. 이 때 역사적 사료는 비석에 있으므로 비석을 탁본하여 내용을 해석하려고 전문가를 물색하였는데, 이선하(李選夏)씨가 그 동창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김영원(金英媛)을 통하여 당시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내가 선택된 것이다.
나는 비행기로 순천공항으로 날아갔고 나를 기다린 초면인 이건재 선생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거침없이 차를 몰고 간다. 나는 아슬아슬하고 너무 위험해 보여서 초조한데도 이 선생님은 가면서 저기가 낙안읍성이며 그곳에 이근매 선생의 아우 자손들이 산다 그리고 또 더 지나간 산골 기슭에는 역적 김자점(金自點: 1588-1651년)의 묘터였는데 역적의 묘라 하여 옛날에 묘를 파내고 그곳에 초(醋)를 끼얹고 땅을 불태웠다는 전설도 들려주시면서 다시 산골을 넘고 물을 건너 보성군 이동리로 갔다.
나는 서툰 솜씨로 이근매 선생의 묘비를 탁본하고, 비문 내용은 탁본하지 않고서도 육안으로 판명되는데 과연 선무원종공신(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의 칭호)이셨고, 서울로 돌아와 선무원종공신녹권 등 사료를 조사하여 이건재 선생에게 송부하였다.
이후 이건재 선생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영 수호를 위하여 군청, 전남도청 등을 찾거나 진정을 올렸으나 허사였네. 이에 거금(액수는 비밀로 붙임)을 들여 청와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서야 소원을 성취하였네.”
이러한 우여곡절을 통하여 분묘를 수호한 이건재 선생은 그 감격을 안고 또 나와 믿음도 트여서인지 그동안 나와의 대화 속에서 품에만 지녔던 말씀을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그동안 나는 남에 집안의 어른 특히 고관 대작들에게만 세워진 신도비를 보았는데, 미관이지만 위국충정을(으로) 순절하신 위인이신 나에 선조님 묘소에도 그를 세워드리고 싶다”하시며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글씨는 국내 최고 명필이 누구인지도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건재 선생에게 당대 명필이 아무 아무개이며 잘 아는 분이므로 성사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드렸고, 이에 선생은 매우 흐믓해 하셨다.
이에 노촌 선생님과 합의하여 내가 먼저 한글로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이를 보신 선생님께서는 사정이 계셔서 세월이 흘러가고, 그러다 이건재 선생이 타계하셨다. 대경(大驚)하신 노촌 선생님께서는 내년 한식에 신도비를 세우게 해달라는 이선하씨의 부탁을 들으시고 부랴부랴 한문으로 글을 지으셨다. 나는 그 글씨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년) 선생에게 부탁하고자 여초 선생의 아들 김형년씨를 통하여 두드려 보았으나 폐백이 높음을 전하고, 이선하씨는 다른 분을 물색하라고 하여 송하경 교수로 낙찰되어, 역사가 완성되었다.
<옛일을 회상하면서 또 선사(先師)를 회상하면서. 그리고 명(銘)은 노촌 선생님께서 직접 지으셨는데, 그것을 포함한 한문으로 된 전체 신도비문을 전에 잘 간직하였는데, 어느때인가 사라져 버렸음을 밝힌다. 불민함, 죄송스러움을 함께 밝힙니다. 2008년 9월 4일 不肖 楊山趙源喬容重씀>
주1)노촌 이구영 선생 묘소(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산 2)와 가까운 곳(직선 거리 1.97km)에 자리한 정헌 조정철 공의 묘소(충주시 수안보면 안보리 354-3)는 자손이 장단에 겨우 몇집만 있었고 남북분단으로 그 이후 묘소를 실전했었지만, 내가 우연히 충주산업대학교에서 1994년에 간행한 충주수안보간 국도사차선확장구간지표조사보고서에 60-61면에 수록된 「조감사묘」를 복사해 놓았다가, 2003년 1월 9일 살펴 본즉 불현듯 족보에 연풍 안부역전(安富驛前)에 묘소가 있다는 기록과 일치하니, 안보리 마을 이장(최현호 님)과 전화로 연락하니 아주 오래 전에 자손 조명희(趙命熙)가 왔다갔으며 그리고 위토답 등이 있다는 기록, 인근 수안보에 사는 먼 일가 조현호(趙賢鎬)씨가 관리하였다는 등 대답을 들어 1월 19일 문중 사람들과 하께 가서 확인하고 이후 문중에서 정식으로 관리하게 된 묘소이다. 우연하게도 정헌공께서 돌아가신 날이 5월 19일인데 이는 나의 생일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