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충서원 묘정비(四忠書院 廟庭碑) 비문 교열 및 번역:
조원교(趙源喬)
사충사원 묘정비
자헌대부 행 용양위 부사직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세자우부빈객 규장각제학 오재순吳載純은 글을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 세자부 홍낙성洪樂性은 글씨를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은 篆額(전서로 된 이마의 글씨)을 쓰다.
지금 임금 5(正祖 5, 1781)년 봄에 임금(正祖)이 元陵(英祖의 陵號)에 행차하여 아래같이 傳敎하시기를
“太歲가 辛丑은 바로 이 해이다. 先大王(英祖)께서 潛邸(왕이 즉위 이전에 살았던 私家)에서 儲位(왕의 대를 잇는 지위 즉 世子 世弟 世孫)로 들어가셨는데 이제 그 舊甲(옛 還甲)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나(正祖) 小子는 오직 공경하게 추모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펼 수 있는 데가 없구나. 아아! 우리 先大王(英祖)께서는 윗대 여러 임금의 마음과 법을 계승하시고 三宗(孝宗 · 肅宗 · 景宗)의 血脈을 이어받아 堯임금 舜임금이 傳受한 것 같이 하셨으니, 仁이 지극하고 義가 극진하여 우리나라 4백년 宗社가 이에 힘입어 태산 반석처럼 편안해질 수 있었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도다. 이 때에 忠獻公 金昌集 · 忠愍公 李健命 · 忠文公 李頤命 · 忠翼公 趙泰采 같은 분들이 있어서 서로 협력하여 받들다가 몸을 나라에 바쳐, 그 精忠과 大節이 밝게 빛나 지금까지 사람들의 耳目에 분명하게 남아 있으니, 이른바 하늘과 땅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質正(바른 것인지 물어봄)하여 보아도 의심이 없어 길이 天下 萬世에 떳떳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에 효경梟獍(자기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는 올빼미와 자기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은혜를 모르는 흉악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같은 무리들이 誣獄을 크게 일으켜 끝내 참혹한 화를 빚었으니 아아! 천하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先朝(英祖 朝廷) 때부터 褒獎하라는 傳敎가 여러 차레 絲綸(명령, 가르침)에 실렸고 한강 가에 祠堂을 짓게 하였으며 四忠이라는 扁額까지 내리셨다. 아! 聖仁이 천하에 공정히 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은혜어린 運數가 있게 된 것이니, 이른바 ‘公議는 일백년을 기다리지 않고 정해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舊甲을 맞아 元陵을 알현하게 되니, 나(正祖) 小子는 어찌 寓感(겸손한 느낌)의 道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날을 가려 四忠祠에 승지를 보내 致祭(임금이 신하에게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이를 위로하는 제사)하게 하라.”하셨다.
아아! 우리 열성조의 지극한 德과 성대한 功이 지극히 皇天(하늘)의 뜻에 부합하여 크게 사랑하여 돌봐줌을 받아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보내서 왕실을 돕게 한 것이다. 살아서는 治化(잘 다스림)의 休明(아름답게 밝힘)을 돕고 죽어서는 종사의 轉危(뒤집어지는 위태로움)를 막았음을 이 四忠祠를 보면 徵驗할 수 있다. 옛날 우리 景宗大王께서 병이 있어 후사를 두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다. 忠獻公은 上相(영의정)으로 모든 大臣 및 六卿(육조 판서)과 함께 입대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영조를 책봉하여 世弟로 삼게 하였다. 그 후 임금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니, 世弟에게 크고 작은 國事를 대신 다스리도록 명을 내려줄 것을 모든 대신들이 諫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聯箚(두 사람이 이상이 올리는 箚子)를 올려 肅宗 丁酉(1717년 7월 19일)의 故事를 따르시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敵豎의 (金)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거깃을 얽어매어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가지고 억지고 罪案을 만드니, 이에 대신 네 사람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다. 忠獻公은 벼슬이 영의정에 호는 夢窩요, 忠文公은 벼슬이 좌의정에 호는 踈齋이며, 忠翼公은 벼슬이 우의정에 호는 二憂堂이요, 忠愍公은 벼슬이 좌의정에 호는 寒圃齋이다. 四公은 모두 先代 朝廷의 대신으로 知遇가 가장 깊었으므로 마음으로 은혜 갚기를 도모하였다. 큰 일을 당하게 되자 義를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진실로 마음 속에 간직한 바가 廓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영조대왕이 즉위하자 곧 (金)一鏡 등 모든 敵을 죽이고 네 대신의 관직을 회복시켰으며, 이어서 시호를 내렸고 儒生 尹來宬 등이 상소하여 사당을 지을 것을 청하자 윤허하였다. 丙午(영조 2, 1726년) 가을에 祠宇가 비로소 완성되고 四公을 나란히 배향함에 四忠이라 편액을 내리셨는데 모두 眞影(肖像)이 있어 四忠祠 사당 안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丁未(영조 3, 1727년)에 兇黨이 다시 헐뜯고 誣告함을 늘어놓아 사당을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乙亥(영조 31, 1755년)에 임금의 토벌이 크게 행해져 흉악한 괴수들과 역적의 자손들이 모두 죄를 받게 되자 그 이듬해(1756년)에 다시 사당을 세우라고 特命하였다. 아아! 辛丑(1721년) 壬寅(1722년)의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 것을 틈타 다른 뜻을 이루어 보려고 임금의 병환을 숨기고 誣獄을 만들어 儲位(世弟의 지위)를 흔들고자 한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天理와 民彝(人倫)는 거의 滅息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四公이 마음을 함께하여 보좌하고 命을 함께 하여 殉國을 하였다. 이에 힘입어 儲位가 마침내 안정이 되어 오늘이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 억만년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어오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皇天에서 혼백이 오르내리는 朝宗들의 보호하고 도와주심에서 힘입은 것이나 四臣의 功을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비록 屈伸(굽힘과 폄)이 있었지만 兩朝(英祖 正祖의 朝廷)의 찬양과 追崇이 지극하였고 높은 忠과 굳센 烈은 해와 별 처럼 빛나게 되었으니, 天道가 심히 밝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사당은 漢江의 아래쪽 露梁의 북쪽으로 京師(서울)와는 10리 떨어져 있다. 사당의 扃(문빗장)과 檐(처마)와 棟(마룻대)이 都城과 宮闕을 拱手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四公이 국가를 돕고 지키던 충성과 가깝다. 章甫 尹光厚 · 李泰謙 등이 비석을 세우기로 꾀하고 載純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옛날에 신하로서 나라에 공이 있으면 鍾 · 鼎에 새기고 旗常(깃발)에 기록하였던 것은 榮耀(榮光)을 보여주고 久遠하기를 圖謨한 것이다. 지금 우리 聖上(正祖)의 열 줄 되는 敎諭는 광명하고 懇測하여 영원 전해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니 어찌 예사로이 旗常(깃발)에 새긴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이 비석의 첫머리에 실어 임금의 총명한 명령을 밝히노라.
서원을 세운지 회갑(60년)이 되는 丙午(정조 10, 1786년)에 세우다.
사충서원은 노량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염려가 있었고 또 철도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오래 유지할 수도 없었기에 마침내 한강 위쪽인 보광리에 터를 잡아 옛모습 그대로 옮기고 규제를 바꾸는 일은 없었다. 묘정비는 醇庵 吳太史가 글을 지었는데 健陵(正祖)의 恩綸(은혜로운 교지, 명령)은 百世에 聖人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라. 이 또한 그대로 옮겨 세우고 그 좌측면에 이 사실을 附記한다. 생각해보니, 지난 戊辰(고종 5, 1868년) 가을 제향에 내가 有司로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이제 6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다시 院長이란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으면서 工事를 주선하게 되니, 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러봄에 감개롭기도 하고 영예롭기도 하다.
비를 세운지 140년만인 丁卯(1927년) 8월 일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 좌찬성 원임 규장각 제학 시강원 貳師 閔泳徽는 추기하다.
지난 丁卯(1927년)에 本院을 노량에서 보광리로 옮겼는데 경인사변(한국전쟁)을 당하여 祠宇는 포탄으로 파괴되고 域內는 난민들에게 점거 당하여 位牌와 眞影을 봉안할 곳이 없었으니, 후손과 후학들의 통탄이 갈수록 더 심하여져 여러 사람의 의논으로 중건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옛 터는 팔고 새 터를 잡는데 廣州의 상산곡리로 정하게 되었다. 戊申(1968년) 이른 봄에 일을 시작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였다. 士林들이 모두 모여 의식에 따라 봉안을 마쳤는데 庭碑에 있어서는 비록 글자가 닳아 없어진 것이 있었으나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옛 모습을 보존키 위해서이다. 이에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비의 끝부분에 기록하여 院中 故事의 一端으로 삼노라.
丁卯 後 41년(1968년) 8월 일에 후학 李完珪는 삼가 글을 기록하다.
忠獻公 從 10세손 金舜東은 삼가 글씨를 쓰다.
사충서원묘정비의 한글번역문비(飜譯文碑)
서기 1726년 사충서원이 창건된 뒤 어언 이백육십일년이 흘렀습니다. 네 충신이 보여준 貞忠毅烈의 宣揚과 聖學의 精進鍊磨를 염원하며 세운 서원의 창건 정신은 여전히 푸르디 푸르고 맑디 맑습니다. 사충서원의 건립 취지와 목적은 사충서원 一周甲이 되는 해인 서기 1786년에 세운 사충서원묘정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석은 과천의 노량과 고양의 보광리에 있었던 옛 사충서원의 모습과 역사까지도 기억하는 실로 값진 보배입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이운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고 특히 1950년 悲劇의 庚寅動亂 때 입은 彈痕들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은 육안으로 全文을 파악할 수 없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려운 漢文이기 때문에 내용 파악하기 어렵고 특히 신세대들에게 외면당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비문을 수록한 四忠書院誌와 비석의 탑본을 참고하여 완성한 비문 전문과 그 한글번역문을 담은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을 통하여 사충서원의 역사와 창건 정신이 길이 쉽게 전승되기를 바라며 후학과 후손들은 분발하여 서원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서기 2018년 무술년 시월 사단법인 사충서원 세움
<篆額>四忠書院廟庭碑」
四忠書院廟庭碑」
資憲大夫行龍驤衛副司直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
館事同知 經筵事 世子右副賓客 奎章閣提學 吳載純 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 世子傅 洪樂性 書」
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金熤 篆」
今上五年春 上幸 元陵敎曰太歲在辛丑是年也 先大王自潛邸入承儲位今焉舊曆云」
囘惟予小子羹墻之慕無地可展嗚呼我 先王述 列朝之心法接三宗之血脉堯傳舜授仁至義」
盡使我四百年 宗社頼以有磬泰之安猗歟盛哉時則有若忠獻公金昌集忠愍公李健命忠文公李」
頤命忠翼公趙泰采協力翊戴以身殉國精忠大節炳炳烺烺至于今昭布人耳目所謂建以不悖質之」
無疑永有辭於天下萬世者非耶不幸伊時梟獍之徒大起誣獄乃構惨禍嗚呼天下寧有是耶粤自 」
先朝襃獎之 敎屢形於絲綸 賜祠江上額以四忠嗚呼聖人公天下之心有是恩數所謂公議不待」
百年而定者亦非耶重逢前甲載謁 元陵予小子烏可無寓感之道也四忠祠遣承旨卜日致祭於戲」
惟我 列聖朝至德盛功克配皇天誕膺眷佑賚以忠良協輔 王室其生也贊治化之休明其死也扶」
宗社之顚危觀乎四忠之祠可以徵焉昔粤我 景宗大王有疾無嗣國人憂之忠獻公以上相同諸」
大臣六卿入對白 上冊 英宗爲 世弟及 上疾益甚命 世弟代理大小國事諸大臣爭不能得」
遂聯箚請循 肅宗丁酉故事賊豎一鏡等投章構揑以建儲代理勒爲罪案於是大臣四人俱及於禍」
忠獻公官領議政號夢窩忠文公官左議政號踈齋忠翼公官右議政號二憂堂忠愍公官左議政號寒」
圃齋四公俱以 先朝大臣知遇最深矢心圖報及其臨大事秉義不貳至死無悔苟非所存乎中者確」
然有不可奪其孰能之 英宗大王旣卽位誅一鏡等諸賊復四大臣爵仍 命賜諡儒生尹來宬等上」
䟽請建祠 許之丙午秋祠始成幷享四公 賜額曰四忠皆有眞像奉祠中丁未兇黨復肆譖誣毁撤」
祠宇乙亥天討大行兇魁逆孽咸伏其辜翌年 特命重建嗚呼辛壬羣兇乘 國勢孤危欲售異圖秘」
諱 上疾構成誣獄以撓撼 儲位當是時天經民彝幾乎滅息四公同心左右幷命以殉而儲位乃」
安得有今日用綿我 邦家萬億年無疆之休是誠頼皇天 陟降垂隲保佑而四臣之功亦豈不偉乎」
哉於今六十餘年之中雖時有屈伸然 兩朝襃崇其至矣而危忠毅烈煒煌如日星天道孔昭斯可」
見矣祠在漢水之下露梁之陰去京師十里而近門扄檐棟長拱城闕實四公扶衛 宗國之誠焉」
章甫尹光厚李泰謙等謀竪繫牲之石屬載純以辭竊惟古者人臣有功於國銘之鍾鼎紀諸旂常亦所」
以示榮耀而圖久遠也今我 聖上十行之諭 光明懇惻永垂無極豈尋常銘旂紀所可比哉謹載碑首以」
昭 寵命 歲建院回甲丙午月日立」
院在露梁歲久而易致傾圮且爲鐵道所偪不可以遠圖乃卜地於漢上之普光里仍舊材而移建規制則無」改焉廟庭碑爲醇庵吳太史所撰而全述 健陵恩綸百世可俟也亦仍移竪而附識于其左方念昔戊辰秋」
亨泳徽以有司參列而今適六十年矣復忝院長周旋工事俯仰感慨亦以與有榮云」
立碑後一百四十二年丁卯八月 日
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左贊成原任 奎章閣提學 侍講院貳師閔泳徽 追記」
粵在丁卯自鷺梁移建本院于普光之里値庚寅事變祠宇爲炮彈之所破兆域爲亂民之所據位牌眞影無所於」
尊奉矣承學之痛嘆愈往愈深僉議重建售舊址而卜新基乃龜食于廣州之上山谷里始役於戊申之莫春竣」
工於同年八月士林齊會奉安如儀至若庭碑雖有刓缺不易而新之者爲存舊貌也遂書顚末于下方以備院」
中故事之一端云」
丁卯後四十一年八月 日 後學李完珪謹識」
忠獻公從十世孫金舜東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