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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고등학교 안 돌계단 -의묘(의경세자 사당)·신비사(단경왕후 신씨 사당)·순회묘(순회세자 사당)·소현묘(소현세자 사당)..

조원교 2021. 5. 2. 08:23

2021년 52

서울 경복고등학교 안 돌계단 -의묘(懿廟 의경세자의 사당신비사(愼妃祠 단경왕후 신씨의 사당순회묘(順懷廟 순회세자의 사당소현묘(昭顯廟 소현세자의 사당영경전(永慶殿)의 흔적

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89-9번지는 경복고등학교의 지번이다. 이 지번의 터는 매우 큰 면적이다. 이곳의 지형 지세는 확연하게 둘로 그것도 동서로 구분된다. 즉 반절인 동쪽은 서쪽에 비하여 아주 두드러지게 높은 곳인 북악산의 산록이고 나머지 반절인 서쪽은 동쪽에 비하여 매우 낮은 곳이며 대부분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면적 약 47912m2(14493)

2)넓게는 장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에 여러 작은 마을과 지명이 함께 있었다. 특히 돌계단 일대는 도화동(桃花洞))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고 운강(雲江) 조원(趙瑗, 1544-1595)의 유적인 운강대(雲江臺)란 지명이 있었다.

3)경복고등학교의 위치 역사 등은 청운동의 청운중학교(청운동 89-143)와 경기상업고등학교(청운동 89-3)와 함께 깊게 얽혀 있다.

 

이 경복고등학교 터에서 지대가 높은 동쪽이나 낮은 서쪽 모두에 조선시대에는 민가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특히 이 일대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린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있었다.

경복고등학교 터를 포함한 일대는 조선시대 말부터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1894년 개설한 농상아문(農商衙門)의 농상국 소속 농상소(農桑所), 1920년까지의 경성식림묘포(京城植林苗圃), 1921년부터는 학교(현재 경복고등학교 )가 들어선 결과 이 일대의 조선시대 건물 등은 완벽하다 할 정도로 사라져버렸다.

현재 경복고등학교 대부분의 교사(校舍)는 동쪽인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교사 중 본관 앞에는 여기에 소개하는 오래된 돌계단(1)(도2)가 남아 있다. 필자는 2016626일 이를 살펴보며 조선시대 건물의 최후 흔적이며 기적적으로 남은 실록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특히 (도1)은 영경전(永慶殿)의 돌계단이라고 단정한 일기를 남겼다. 그 다음날 서울특별시청 문화재과 조사연구팀에 돌계단(도1)에 대한 필자의 위 견해를 전달하였다. 서울특별시청에서는 직후 전문가를 초빙하여 심의하고 조선시대 역사문화유산이 아니라는 결론을 필자에게 전화로 통보하였다.

필자는 이 돌계단(도1)이 조선시대 소중한 역사를 전하는 역사문화유산이라 판단하며 더욱 정확한 평가를 받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돌계단(도1)(도2) 중 특히 (도1) 언저리는 대대로 조선 왕실의 사당 터였고 돌계단은 오늘까지 이 사실을 증언하는 단서이다. 이 결론, 주장은 특히 두 가지로 근거로 삼는다. 첫째 돌계단의 외형이나 마모 상태, 가공 수법이 적어도 근백년 이후작은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 이 돌계단(도1) 위치가 창의문과 경복궁의 중간 쯤이고, 돌계단 방향이 남향인데 이 두 가지가 조선 영조 때 그린 지도 해동지도海東地圖 내 경도京都(도6))의 영경전 위치와 방향까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해동지도 내 경도지도에서 영경전은 창의문과 경복궁 중간 정도에 위치하며 건물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돌계단(도1)은 9단으로 구성되는데 맨 윗단에는 네모진 작은 홈이 두 개 있다. 이 홈은 별도 부설된 문의 문설주를 끼웠던 곳이다. 비근한 모습은 서울 창덕궁 후원 주합루(보물 제1769)를 향하여 배치된 상하 두 계단 중 아래 계단에 있는 어수문(魚水門)(도3)(도3-1)이나, 서울 육상궁(毓祥宮, 사적 제149)의 내삼문(도4), 서울 신교동 옛 선희궁의 계단(도5)(도5-1) 등에 있다.

(도1)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의 돌계단. <세로 약 317cm, 가로 약 431cm,)
(도1-1)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의 돌계단
(도1--2)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의 돌계단. <맨 윗 계단 폭 약 60cm, 나머지 계단 폭 약 33-36cm>
(도1-3)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의 돌계단. <맨 윗 계단에는 사진에서 보듯 두 개의 네모진 홈이 있다.>
(도2)경복고등학교의 또 다른 돌계단. <(도1) 돌계단의 남서쪽 약 70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역시 근백년 이전작으로 보인다.>

 

(도3)창덕궁 주합루宙合樓(위)와 어수문魚水門(아래)의 원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주합류와 어수문은 조선, 18세기. 사진은 일제 강점기 촬영,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 보물 제1769호>
(도3-1)창덕궁 어수문(魚水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돌계단 위에 문을 설치하였다.(사진은 일제 강점기 촬영)>
(도4)서울 칠궁 내 육상궁(毓祥宮)의 내삼문과 돌계단.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사당이다.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 사적 제149호, 가운데 계단 가로 122cm, 폭 약 33cm>>
(도5)서울 옛 선희궁(宣禧宮)과 돌계단. <선희궁은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옛 사당이다.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1-4번지, 선희궁 건물과 터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이 선희궁 건물 안에서 영빈이씨의 신주는 1908년 현재 칠궁으로 옮겨 봉안되었다. 옛 선희궁 터에는 사진과 같이 옛 사당과 담장 그리고 은행나무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선희궁 터를 활용하여 1912년 조선총독부 소속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의 양육부(養育部)가 들어섰고, 현재는 서울맹학교 및 농학교가 있다. 사진 맨 앞 돌계단(가로 약 205cm, 계단 폭 약 32cm,)의 본래 위치는 아님이 분명하다. >
(도5-1)서울 옛 선희궁(宣禧宮)과 돌계단(사진 맨 앞). <사진 맨 앞 돌계단(가로 약 205cm, 계단 폭 약 32cm,)의 본래 위치는 아님이 분명하다.>.
(도6)경복궁 서북쪽에 위치한 영경전(永慶殿)이 표기된 지도 「해동지도 내 경도京都)」(부분) 조선 영조 20(1744)-영조 26(1750)년 사이에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돌계단 언저리에 있던 조선시대 주요 건물 명칭과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이곳의 첫 번째 역사는 조선 개국일등공신 조박(趙璞, 1356-1408)의 증손인 조영달(趙永達)(家舍)으로 나온다. 조영달은 예종 1(1469)년 남이(南怡) 장군의 옥사(獄事) 때 처벌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재산은 나라에 몰수당되었는데 그 중에 집은 이듬해 성종 1(1470)년 왕명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의 아들) 부인(대방부부인) 송씨에게 하사되었다. 그리고 1471년에는 이 집의 이름을 연경궁(延慶宮)으로 고치게 하는데 이는 많은 종친 중에서도 특히 영응대군 부인에게 파격적인 예우, 배려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영응대군의 또 다른 정실 부인이 살고 있었을 안국동 영응대군 본제(本第)와 달리하는 거처, 내지는 재산을 마련해주는 배려로 이 집을 하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4)실록에는 조영달趙穎達인데 이는 오기誤記이다.

5)세종은 영응대군(1434-1467)을 매우 애지중지하였다. 영응대군 집(정확하게는 영응대군 집 동별궁)으로 피병을 나갔다가 승하한 것도 그 일면이다.

6)송씨 부인(-1507)은 세종 27421일 혼인한 영응대군의 첫 부인인데 병약하다는 이유로 강제 이혼을 당하였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영응대군은 세종 31626일 고() 부윤(府尹)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새 장가를 들게 되었지만 송씨 부인을 잊지 못하여 몰래 계속 만나 자녀를 얻었으며 뒤에 부인으로 다시 맞아들였다. 이 송씨 부인과 그 가족의 조선 욍실과의 특별한 관계는 생략한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난신(亂臣) 조영달(趙穎達)의 가사(家舍)를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下賜)하라.”> ?성종실록? 1(1470)130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처() 송씨(宋氏)에게 바친 집을 연경궁(延慶宮)으로 고쳤다.> ?성종실록? 2(1471)724

 

성종 1(1470)년에 왕의 생부인 의경왕(1475년에 덕종으로 추존) 사당을 의경왕의 장자인 월산대군의 사저 안에 건립하고 이름을 의경묘(懿敬廟)라 하였다. 이 의경묘 위치는 추정컨대 월산대군 사저로 널리 알려진 한성부 서부 황화방 지금의 덕수궁 자리로 추정된다. 의경묘는 이후 성종 2(1471)년에 의묘(懿廟)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3(1472)년에는 왕명에 따라 연경궁 안으로 옮겨진다.

연경궁에 의묘를 이건하라는 왕명과 함께 연경궁은 의경왕의 봉사를 맡은 의경왕의 장남 월산대군에게 하사하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에게 하사된지 겨우 삼여 년 지난 뒤의 조치, 그것도 송씨 부인의 별세 이전이다. 이로 보건대 이 연경궁 터는 송씨 부인에게 하사하기 이전부터 왕실에서 매우 높게 판단하며 어쩌면 수용하려던 의사까지 있었지 않나 여겨진다. 의묘가 들어서게 된 결과 이곳은 명실공히 왕궁 밖에 있는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높은 품격을 지닌 터가 되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다.

 

7)덕종(1439915-145792)은 세조(世祖, 1417년생, 재위 1455-1468)의 장남이다. 그는 처음에는 왕손으로 도원군(桃原君)으로 봉해졌고 아버지 세조가 1455년 왕위에 오르자 세자(세조 일(1455)726일 책봉)가 되었지만 세조 3(1457)년 요절하였다. 세조 31115일 시호 의경(懿敬)을 받아 의경세자라 불렸다. 이후 그의 둘째 아들 잘산군(乽山君)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자 의경왕(懿敬王, 성종 1, 1470122), 덕종(성종 6, 1475109) 순서로 추존되었다

8)월산대군의 사저이자, 성종의 잠저는 후에 명례궁, 경운궁, 덕수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필자 원고,명례궁明禮宮 인장을 통한 명례궁 연구,국립중앙박물관 156회 큐레이터와의 대화(2010.9.2.).

9)?성종실록? 4(1473)920일에 의묘가 완공되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그 이전 연경궁의 의경왕 신주는 연경궁 안 어느 건물에 일시 봉안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략-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시호(諡號묘호(廟號능호(陵號)와 수빈(粹嬪)의 휘호(徽號)를 의논하도록 하니, -중략- 전교(傳敎)하기를, " -중략- 의경세자의 시호는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묘호는 의경묘(懿敬廟)로 하고, 능호는 경릉(敬陵)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는 인수왕비(仁粹王妃)로 일컬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1470)122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교(傳敎)를 받으니, ‘의경묘(懿敬廟)의 이름[]을 고쳐서 아뢰라.’ 하였는데, 삼가 한()나라 선제(宣帝)의 일을 고찰하건대, () 황태자(皇太子) 사황손(史皇孫)을 추시(追諡)함에 있어 시호를 따라서 국호(國號)를 삼았다고 하니, 청컨대 의묘(懿廟)’로 일컬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1471)1222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제 의묘(懿廟)를 연경궁(延慶宮) 후원(後園)에 세웠으니(?) , 그 연경궁(延慶宮)을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에게 주어라." 하였다.> ?성종실록? 3(1472)122

 

10)원문은 傳旨戶曹曰 今構懿廟于延慶宮後園 其延慶宮 賜月山大君婷이다. 위 조선왕조실록 해석 중 세웠으니를 필자는 세우려하니또는 세울 것이니로 해석하고자 한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월산대군 이정의 집에 거둥하여 의묘를 세울 곳을 보았다.> ?성종실록? 4(1473)121

<의경묘(懿敬廟)가 완성되었다. 의장(儀仗)을 갖추고 의경왕(懿敬王)의 신주(神主)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여 월산대군 이정으로써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4(1473)920

<회간왕(懷簡王) 묘호(廟號)를 덕종(德宗)이라고 올렸다.> ?성종실록? 6(1475)109

 

11)회간은 중국 명나라에서 성종 6(1475)1월에 내린 의경왕(덕종)의 시호이다.

 

연경궁 의경묘에는 덕종의 신주만이 아니라 덕종의 어진도 함께 봉안하였음을 아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의경묘(懿敬廟) 성종 4(1473)년에 덕종의 별묘(別廟)를 연경궁(延敬宮) 세우고 화상을 후전(後殿)에 봉하였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소재지가 자세하지 않다.> ?동국여지비고?, 단묘(壇廟)

 

12)延慶宮延敬宮의 오기이다.

13)?동국여지비고?는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고종 2(1865)년 경복궁의 중건 기록이 있고 고종 20(1883)년 창설된 북묘(北廟)에 관한 기록이 없는 점을 통하여 편찬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고종이 1897220일 경운궁(명례궁)으로 이어하기 이전에 편찬되었다.

 

1475109일 의경왕이 덕종이란 묘호를 받은 왕으로 추존된 결과 연경궁 의묘에도 예법에 따른 변화가 도래하였다. 왕과 왕비의 공식적인 최고의 제사는 도성 안 종묘(宗廟, 太廟, 正廟)나 왕궁 안의 사당(原廟)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입각하여 성종 7(1476)1월 연경궁 의묘의 의경왕 신주는 땅에 묻고 덕종이란 묘호를 넣은 새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봉안하는 부묘(祔廟)를 하였다. 이와 별도로 덕종의 또 다른 신주를 만들어 경복궁 신무문 안 옛 세자궁 자리에 연은전(延恩殿)이란 원묘(原廟)를 마련하여 봉안하였다. 이 연은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복설하지 않았다.

 

14)묘의 원()거듭한다는 뜻으로 거듭 세운 사당이란 뜻이다. 정묘(正廟)인 종묘가 있음에도 거듭 세웠기에 원묘란 한 것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회간대왕(懷簡大王)의 별전(別殿)을 연은전(延恩殿)이라 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6(1475)1014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회간대왕(懷簡大王)을 부묘(祔廟)하는 날에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구신주(舊神主)를 종묘(宗廟)의 북계(北階) 사이에 받들어 묻고, 아울러 전일에 의묘(懿廟효정묘(孝靖廟)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묻는 것도 또한 종묘(宗廟)에 받들어 묻되, 연은전(延恩殿)의 악장(樂章)은 그대로 의묘(懿廟)의 악장을 쓰며, 상책(上冊)의 악장(樂章)은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제술(製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6(1475)1024

 

15)?인조실록? 10(1632)421일에는 성종 61012일 종묘에 부묘한 것으로 나온다.

16)명종(明宗, 재위 1545-1567) 2(1547)916일에 인종의 혼전인 영모전(永慕殿)에서 인종의 신주를 받들어 내어 다음날(917) 연은전에 부()하였다.

 

<임금이 회간대왕(懷簡大王)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대실(大室)에 올려 합사(合祀)하고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지냈는데, 백관(百官)들이 임금을 모시고 제사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성종실록? 7(1476)110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의 영정을 봉안할 곳을 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상의하였고, 성묘(成廟) 때의 일을 상고하였습니다. 신숙주(申叔舟)추모록(追慕錄)계사년 가을에 사당이 완공되었다. 우의정 성봉조(成奉祖)에게 옛 사당에 가서 어진(御眞)을 모셔다가 새 사당의 후전(後殿)에 옮겨 봉안하라 하고, () 신숙주에게 신주(神主)를 모셔다가 새 사당의 정전(正殿)에 봉안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의묘(懿廟) 때의 일입니다. ?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을미년 1012일 회간대왕(懷簡大王)을 부묘(祔廟)하고 의묘를 봉안한 절목에 위판(位版)을 의묘에 봉안하고 영정과 시고책(諡誥冊)을 의묘 영전(影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덕종의 신주는 이미 부묘하였으나 연은전(延恩殿)은 이때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묘에 위판을 봉안하게 하여 문소전(文昭殿)과 같게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의 영정은 시종 별전에 봉안되었고 제사를 지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인조실록? 10(1632)421

 

17)이 대왕은 선조의 아들 정원군(定遠君)이다. 정원군은 아들 인조 때 원종(元宗)으로 추존.

 

따라서 연경궁에 있던 사당 의경묘(懿敬廟)는 성종 7(1476)1월경 이후 한동안 신주가 없는 상태 빈 건물 또는 건물조차도 없는 빈 터로 남게 있었다.

이 자리에 선조 34(1601)년 순회세자(順懷世子, 명종 6, 1551-명종 18, 1563))와 그 부인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명종 7, 1552-선조 25, 15924) 내외의 사당인 순회묘가 들어섰고 인조 25(1627)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 광해군 4, 161214-인조 23, 1645)의 신위를 모신 소현묘(昭顯廟) 들어섰다. 아래 기록에 의하면 두 세자의 신주가 한 사당 건물 안에 합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숙종 4(1678)년 순회세자 내외의 신주를 매안(埋安)하였고 정조 즉위(1776)412일 내린 왕명으로 그 직후 소현세자 내외 신주도 매안하니 신주가 없는 빈 건물이 되었고 이 상태는 ?동국여지비고?,의 기록 등에서 보듯 대한제국기까지도 지속되었다.

 

18)소현세자의 부인(세자빈) 강씨(姜氏, 광해군 4, 1612-인조 24, 1646)는 소현세자가 죽자 궁중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모략으로 폐빈(廢嬪)이 되었고, 인조 24(1646)315일 죽임을 당했다. 숙종 44(1718)4월 복위되고 시호를 민회(愍懷)라 하니 이후 민회빈(愍懷嬪) 강씨로 불렸다. 이 민회빈 강씨도 복위되자 소현묘에 부묘되었다.

 

<영경전(永慶殿): 창의문 남쪽에 있는데, 선조 34(1601)년에 지었으며, 순회세자(順懷世子)를 향사(享祀: 제사를 지내는 행위)한다. 인조 25(164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함께 향사하였는데, 후에 두 신주를 합사하여 매안(埋安)한 후에 빈 전(殿)만이 남았다.> ?동국여지비고?, 단묘(壇廟)

<순회묘(順懷廟): 도성 안 북쪽. 옛 영경전(永慶殿)에 있다. 선조 34(1601)년에 세우고 순회세자 및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를 향사하였다. 숙종 4(1678)년에 신주를 땅에 묻었고 뒤에 (이곳을) 소현묘(昭顯廟)가 되었다.> ?동국여지비고?, 단묘

<소현묘(昭顯廟): 인조 25(1647)년에 소현세자와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를 향사하였다. 순회묘와 묘()가 같으며 즉 (한 건물 안에) 벌여놓고 향사하였다가, 숙종 4년에 이르러 단독으로 향사하였다. 제삿날은 저경궁(儲慶宮과 같다. > ?동국여지비고?, 단묘

 

19)?동국여지비고?, 단묘(壇廟저경궁(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의 사당. 인빈김씨는 원종의 생모이다.>에 저경궁의 제사는 춘분ㆍ추분ㆍ하지ㆍ동지와 절일마다 거행한다고 나온다.

 

<소현묘(昭顯墓)와 민회묘(愍懷墓) 신주(神主)를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恭懷嬪)의 예대로 묘소에 묻고, 단지 한식(寒食) 때의 한 차례 제사만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숙묘(肅廟) 4(1678)년에 정식(定式)한 것을 들어 품정(稟定)했기 때문이었다.> ?정조실록? 즉위(1776)412

 

20)필자는 이 순회묘順懷墓와 민회묘愍懷墓 기록에서 특히 순회묘順懷墓는 순회묘順懷廟 誤記라고 본다. 민회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시호이다.

 

<첨지중추부사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기를, “ -중략-국가의 사전(祀典)은 오세(五世)가 되면 조천(祧遷)하게 되어 있는데 세자(世子)의 묘()에 이르러서도 그 예()는 이를 따른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소현묘(昭顯廟)는 이미 신위(神位)를 철거하고 묘향(廟享)을 파하기에 합당한 것인데 더구나 처지가 제향할 바가 아니고 또 불경(不經)스러운 것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하략(下略)”.> ?정조실록? 6(1782)62

 

그런데 위 기록 등을 통하여 순회세자의 사당 이름은 정식 이름인 순회묘 이외에 영경전(永慶殿)이란 별명으로 많이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영경전이란 이름은 이후 소현세자 내외 신주만 모신 사당의 정식 명칭인 소현묘의 별명으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더구나 정조 때 소현세자 내외 신주마져 모두 매안된 빈 사당임에도 소현묘라는 정식 이름과 더불어 대한제국기까지 계속 불렸다. 영경전이 소현묘의 별명으로도 이어진 것은 조선 후기 지도 등에서 두 이름이 혼칭 표기된 데서도 확인된다.

한 사당 건물에 신주를 함께 또는 단독으로 봉안하였던 순회묘와 소현묘는 서로 혼동하지 않으려 옛() 영경전, 영경전으로 달리 불렀음을 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필자는 영경전이란 별명은 의경왕의 사당 연경궁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본다. 영경은 음이 유사한 연경의 변음(變音)으로 본다.

영경전은 순회묘나 소현묘에는 가당치 않은 이름이다. 왜냐하면 전(殿)이란 명칭은 왕과 왕비 이상의 신분과 관련된 건물에 붙이는 이름이고 그 아래 신분인 세자나 세자빈의 신분과 관련된 건물에는 붙일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측면으로 볼 때 영경전이란 별명은 어쩌면 연경궁 안 의묘가 존속하였을 때 통용된 이름이고 이 이름이 가당치 않지만 같은 장소에 들어 선 순회묘 소현묘에도 계승된 것일 수 있다 여긴다.

아래 기록의 영경전은 위에서 소개한 영경전과는 다른 장소에 있던 건물 즉 장경왕후 윤씨의 혼전(魂殿) 이름이다. 혼전은 왕궁의 상례 기간에 왕궁의 전각에 설치하는데 장경왕후 윤씨(성종 22, 1491-중종 10, 1515)의 혼전인 영경전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 영경전은 중종 사후에 장경왕후의 신주가 종묘로 부묘(祔廟)되며 폐지되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우주(虞主) 영경전(永慶殿)에 봉안하였다.> ?중종실록? 10(1515)년 윤44

 

21)우주(虞主)는 우제(虞祭)를 거행할 때에 모시는 신주. 우제 虞祭는 제사 중 하나이며, 장사(葬事)를 지낸 뒤 망자의 혼백을 제사지내는 상례 의식이다.

 

아래 지도들(도7)(도8)(도9)에는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소현묘 또는 소현묘의 별명인 영경전 등이 표기되어 있다. 특히 영조 20(1744)-영조 26(1750)년 사이에 제작한 지도 해동지도 내 경도京都(도6)에는 앞서 소개한 바대로 소현묘(영경전)가 창의문과 경복궁 사이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7)소현묘(昭顯廟)가 표기된 지도 「도성대지도」(부분) 조선, 18세기 후반,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2004년. p.6 좌측 전재(轉載)
(도8)소현묘(昭顯廟)가 표기된 지도 「한성부지도」(부분) 대한제국, 1900년경, 영국 왕립아시아협회 소장(동판본), 세로 45, 가로 45cm
(도9)소현묘(昭顯廟)가 표기된 지도 「한성부지도」(부분) 대한제국, 1902년 국 왕실 아시아 협회가 제작,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1, 서울 서문당, 1994년, pp.12-13 전재(轉載)

아래 기록에서 보듯 구 연경궁 자리에 있던 소현묘 또는 영경전으로 불리던 사당의 북쪽에 숙종 25(1699)년에 단경왕후 신씨(성종 18, 1487-명종 12, 1557)의 사당도 세운 바 있다. 단경왕후 신씨의 이 사당은 신비사(愼妃祠)로 불렸는데 이는 정식 이름이 아닌 별칭, 속칭이다. 신비사는 단경왕후 신씨가 영조 15(1739)년 왕후로 복위되고 그 신주가 종묘에 부묘되자 철폐되었다.

 

<이에 앞서 신비(愼妃)의 사당(祠堂)을 세울 절목(節目)에 대해 품정(稟定)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예관(禮官)이 다시 사당 세울 것을 품하여 소현묘(昭顯廟)의 북쪽 담장 밖에다 정하고, -하략-> ?숙종실록? 25(1699)528

<신비사(愼妃祠): 숙종 24(1698)년에 사당을 연경궁(延慶宮: () ()는 경() 자를 잘못 적은 듯하다)의 옛 터에 짓고 내관(內官)으로 수직하게 하였다. 영종(英宗) 기미년(영조 15, 1739)에 태묘(太廟)로 올려 배향하였다.> ?동국여지비고?, 단묘

 

<마한 유민 작성 서울 청운동 일대의 원고 목록>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안 옛 청풍계 마지막 개울가에 겨우 남은 버드나무,馬韓 遺民(2015.6.17.).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百世淸風) 글씨,馬韓 遺民(2015.6.18.).

조원교,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뒷산(인왕산 기슭)의 거북 바위(청운동 4-39번지),馬韓 遺民(2015.10.6.).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뒷산(인왕산 기슭, 청운공원) 기어가며 자라난 소나무,馬韓 遺民(2016.11.13.).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뒷산(인왕산 기슭, 청운공원)의 능선 반룡강(蟠龍崗) 또는 와룡강(臥龍崗)에 대하여,馬韓 遺民(2016.11.16.).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1(청운어린이집 서쪽(청운동 4-39번지),馬韓 遺民(2016.11.16.).

조원교,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의 청풍계淸風溪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집터에 대하여,馬韓 遺民(2016.11.16.).(2020.1.14. 보완)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2(신교동 2-140번지와 옥인동 산 3-1번지),馬韓 遺民(2020.1.29.).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신교동 2-140번지의 동물 모양 바위 유적,馬韓 遺民(2020.2.2.).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2(신교동 2-140번지와 옥인동 산 3-1번지)의 보완,馬韓 遺民(2021.1.17.).

조원교,서울시 청운동 52-8번지 출토 분청사기편에 있는 특이한 연화문 -‘우주적 표현인 삼재三才(··)를 수용한 연화문의 일례-,馬韓 遺民(2021.1.18.).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3(신교동 2-140번지),馬韓 遺民(2021.2.27.).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4(신교동 2-140번지),馬韓 遺民(2021.2.27.).

조원교,서울 인왕산 기슭 종로구 신교동 2-140번지의 다정한 두 자두나무,馬韓 遺民(2021.4.3.).

조원교,서울 인왕산 기슭 옥류동(玉流洞) 계곡의 봄,馬韓 遺民(2021.04.04.).

조원교,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 5(종로구 신교동 2-140번지),馬韓 遺民(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