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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휴암 백인걸 선생의 부인 평택임씨 묘비/2022년 5월 23일

조원교 2022. 5. 23. 00:20

 

2022523일 경기도 양주시 휴암 백인걸 선생의 부인 평택임씨 묘비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경기도 양주문화원으로 부터 필자는 19981230일 양주군과 양주문화원이 공동 발간한 두 건 책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 받았다. 1999년 아끼던 필자의 책을 양주문화원에 넘긴다고 전화를 걸자 책을 가지러 온 양주문화원 이도남 상임위원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1)

 

1)필자는 공직 생활 305개월간 받은 책들(대부분 박물관에서 발행한 책)을 대부분 간직하지 않았다. 관내에 도서관이 있었기에 구태여 개인 소장용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 여기며 책은 필요한 장소에 있어야 하고, 필요한 사람들이 쉽게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결과이다. 인사 이동 때마다 무거운 책들도 함께 옮기는 번거로움도 없었고 꼭 필요하고 중요한 책만 간직하며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가에 책이 약 일천여 권이 넘어가던 때 그리고 다른 부서로 전출을 가던 1999년 초 공공 장소로 넘기는 첫 시도를 하였다. 먼저 집 가까이 있는 곳이고 집 아이들도 많이 이용하던 종로구 사직동 소재 시립도서관에 타진을 하였더니 전문 도서라서 아니 받는다고 하였다. 모 시립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전공 서적, 서가 부족 등이 내미는 이유인데 사실 도서등록에 따른 인력 부족이 주된 거절 사유였다. 이에 도서관은 포기하고 역사문화를 중점 다루는 문화원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필자의 본관이 양주이기에 양주문화원에 전화하였다. 당시 이도남 상임위원이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특히 도서관 이용자들이 매우 많다고도 하니 필자는 더 많은 책을 골라 넘겼다. 문화원 측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두 번 집에 한 번 와서 가져갔다. 이후 모은 책들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도서관(백남경 님 등을 통하여 드림) 전곡도서관에 세 번 넘겼다. 그리고 필자의 지인들이 찾아오면 책을 선물하곤 하였다. 이 일은 인생길에서 잘한 일로 손꼽힌다고 여기고 있다.

 

 

필자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은데 용케도 그 정통 분야 책이니 더욱 반갑게 여기며 서가에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리에 배치하였다. 이 책 안에는 양주 지역에 수 많은 비석들 가운데 엄선한 비석들이 흑백 사진, 원문, 번역문 순서로 실려 있다. 2)

 

2)<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 총 652면에 사적비 7, 신도비 39, 암각문 417, 기타 529점이,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 총 710면에 묘갈 64, 묘표 45건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선물 받은 첫날 흥미진진한 이 책 안에서 필자는 조태채(1660-1722, 호 이우당二憂堂, 우파牛坡)의 글씨를 발견하였다. 필자가 아는 한 조태채의 필적은 현재까지 간찰 이외에는 발견된 사례가 없다. 따라서 비록 친필이 아닌 친필을 새긴 금석문이지만 처음으로 발견된 큰 글씨이기에 양주문화원에 책을 인도한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닌 필연적 운명이었다고 여겼고 그 감격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슴 속 깊이 흐믓하게 남아 있다.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에서 찾은 조태채의 글씨는 휴암 백인걸의 전처 평택임씨의 비석이다. 후면에 趙泰采書라고 적혔는데 전체 비문도 조태채가 지은 것이 분명하다. 그 비문과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감격을 안고 비석을 찾았고 탁본 전문가를 초빙하여 탁본도 실시하였다.

 

夫人己卯名賢林公諱末孫之女休庵白公諱仁傑前配也早年3) 棄世葬于龍仁治西山義谷本宗先塋丙戌坐之原休庵公墓在楊州後配順興安氏祔兆夫人有子惟恭早卒無後子縣令惟恒承旨惟咸後夫人出也後孫零替墓道舊墓表?4) 崇禎再癸巳始樹休庵公神道碑以其餘力營立而年代旣遠事實無憑平日懿範一未得記嗚呼痛哉

外五代孫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兵曹判書知 經筵事趙泰采謹書

 

3)은 필자가 추정한 글씨다.

4)?은 다시 찾아가 확인하여야 할 글씨이다. 으로도 보인다.

 

부인은 기묘명현인 임공 휘 말손의 5)  따님이며 휴암 백인걸의 전배(전처)이다. 일찍 세상을 떠나서 용인 치소 서쪽 산의곡(山義谷) 6)  本宗의 7) 선영 동남향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휴암공의 묘소는 양주에 있다. 후배 순흥안씨는 묘에 부장하였다. 부인에게 아들 유공이 있었는데 일찍 죽어 자손이 없다. 현령 유항 승지 유함은 후부인에서 출생하였다. 후손이 영체(零替)하여 8) 묘도에 옛날에 묘표가 없었다가 숭정 두 번째 계사(숙종 39, 1713년)에 비로소 휴암공의 신도비를 세우고 그 남은 힘으로 경영하여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부인에 관한) 년대가 이미 오래된 일이라서 사실을 기댈 만한 것이 없고 (부인의) 평소의 아름다운 예의 범절을 한가지라도 기록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고 애달프도다.

5대손 보국숭록대부 행 지중추부사 겸 병조판서 9) 지 경연사 조태채가 삼가 글씨를 쓰다.

 

5)사마방목에 따르면 임말손은 성종 5(1474)년 생원 진사에 모두 들었고 부친은 영유현령 임계하(林啓賀)로 나온다.

6)산의곡은 조선시대 경기도 용인현 산의곡이다. 龍仁郡 水枝面 二儀里 山義室였다가 지금은 水原市 二儀洞 山義室이다.

7)여기 본종은 친정인 임씨 가문이다.

8)零替세력이나 살림이 떨어지게 됨..

9)조태채는 숙종 30(1704)718일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동년 104일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숙종 331124일 다시 병조판서로, 숙종 34127일 명조판서 면직, 숙종 38816일 병조판서 숙종 39919일 병조판서 사면(연경에 사신으로 가게되어)

 

세상에 알려진 조태채의 글씨는 편지 몇 장에 그친다. 그리고 명망가로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짓게 되는 묘비(신도비 포함) 묘지(묘지명)은 단 두 편이다. 이 두 편은 문집 이우당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빙부의 묘표((심익선, 풍덕부사심공묘표)이고 다른 하나는 부인 청송심씨의 묘표(망실 증정경부인 청송심씨묘표, 영의정 심지원의 손녀, 삼학사 중 하나인 화포 홍익한의 외손녀)이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조태채는 어머니인 수원백씨<1623-1709년, 백인걸의 현손녀 즉 4대손, 백인걸의 증손인 곡산부사 백홍일(白弘一1603-1684년)의 따님>에 대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음이  그의 문집 이우당집 등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조태채는 아버지 조희석(趙禧錫, 1622-1662)의 괴산 군수로 근무하던 중 괴산 내아에서 현종 1(1660년 11 9일 출생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임지에서 현종 3(1662)년  9월 4일에 41세 나이로 과로로 인하여 순직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으니 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안고 살았고 어머니를 더욱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세 형<태래(泰來; 1640-1705년, 돈녕부 도정) 태휘(泰彙; 1651-1700년, 영천 군수 때 순직), 태과(泰果; 1657-1726년, 충주목사)>을 아버지 처럼 공경하였으며 막내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외직 역임 때에도 마찬가지) 이 때문에서인지 더욱 외가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외가 선조인 증정부인 평택임씨 묘표문을 짓고 세웠으며(1713년), 휴암 백인걸 신도비의 건립(1713년)을 주도한 것은 휴암선생문집이나 양주조씨족보 기록 등을 통하여 확인된다.

 

백인걸 신도비 숙종 39, 1713년 세움

백인걸 부인 평택임씨 묘비 숙종 39, 1713년 세움으로 추정

신도비문을 지은 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신도비문을 송시열에게 청한 이 백홍일(白弘一1603-1684년)

백인걸의 현손녀, 백인걸의 증손인 백홍일의 딸 수원백씨(조희석 부인) 1623-1709년

조희석(趙禧錫, 1622-1662)

조태채(趙泰采, 1660-1722)

위 연대 등을 고려하여 볼 때 백인걸 신도비문은 송시열 생존 당시 백홍일 등이 청하여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을 새긴 신도비 건립은 송시열 사후, 백홍일 사후, 조희석과 그 부인 사후인 1713년이다. 따라서 휴암선생문집에 밝혔듯이 백인걸 신도비를 세우는 데 있어서 조태채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였음이 분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조태채에게 이 두 비석 건립은 4년전 별세한 어머니(수원백씨)에 대한 그리움과 효심 표현이었고 동시에 외가에 대한 정리情理 성의 보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아래는 필자의 일기이다.

2001년 10월 20일

楊州別山臺놀이 상설야외공연장이 완성되어 성대한 낙성식을 한다고 하여 효순이와 楊州에 다녀왔다. 공연장은 국내에서 최초로 건립된 것이라고들 하는데 내가 알기에는 아마 경상도 일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공연장 근처에

양주목 동헌터와 향교가 있고 동헌터 마당에 碑群 中

10대조 이우당 선조의 從兄이신 都憲(대사헌)公 趙泰東 어른의 선정비를 보고

기타 다른 선정비 중에 李衡祥 및 휴암 백인걸 선생의 선정비도 보고....

특히 휴암 백인걸 선정비는 참 逸品이다.

2002년 519

가족들과 함께 양주군 남면 효촌리 休庵 白仁傑 선생 묘역에 가다.  지난 가을에 이어 재차 찾아 간 것이다. 도중 몇일 전부터 탁본을 부탁하였던 후배 康赫을 양주군청 앞에서 만나 함께 휴암 백인걸 선생의 前配 贈貞敬夫人 平澤林氏碑碣을 탁본하였다. 碑碣은 본래 龍仁에 있던 親庭 산에 있었는데 약 20여년전에 휴암 선생의 墓域으로 묘소 移葬과 더불어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글씨는 10대조 二憂堂할아버지께서 병조판서 재임시 쓰신 것이다. 비갈 끝에서와 같이 이우당 할아버지께서는 휴암의 外五代孫이시다. 즉 나의 11대조 槐山公할아버지의 배위 水原白氏할머니께서는 바로 휴암의 증손이신 府使 白弘一의 따님이시다. 이 비석의 글씨는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이우당할아버지의 친필이시다. 글씨도 매우 단정하면서 아름답기에 가치가 높다고 보아 오늘 탁본하였다. 이 비석은 그 비문에서 밝혔듯이 1712년경 휴암 선생의 신도비를 세운 餘力으로 세웠다. 이 비석과 휴암의 신도비의 비문에서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때 이우당 선조께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宋恭鎬 선생께서 1986년 글을 지은 영인본 이우당집의 해제(제목: 二憂堂集解題)에도 밝혔다.

탁본을 마치고 포천 누님을 만나러 가 백운 계곡에 함께 가 저녁식사를 자연과 더불어 마치고 광덕 고개까지 올라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니 1040분경이다.

 

2008 11 8

예전에 楊州文化院에서 가지고 온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에 수록된 여러 비문 중에

놀랍게도 10대조이신 二憂堂 先祖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우당 선조의 외가 五代祖母 平澤林氏의 비석 글씨다.

이 평택임씨 부인은 休庵 白仁傑 선생의 첫부인이시다.

이우당 선조의 모친 즉 나의 11代祖母는 휴암 선생의 曾孫이신

府使 白弘一의 따님이시다.

이 비석 글씨는 이우당 선조께서 지으신 장인 豊德府使 沈益善 公의 비문과 더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심익선공은 領相 沈之源養子이시다. 해평윤씨 부인(尹宗之의 따님)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심씨 遠族에서 심익선공을 養子삼으셨다.

그러나 심지원공은 후에 재취부인께서 아들을 낳았다. 바로 그 중 한 분은 효종의 둘째딸 淑明公主과 결혼하여 駙馬 靑平尉가 된 沈益賢이시다. 따라서 나의 10대조이신 二憂堂 선조는 청평위의 조카사위인 것이다. 심익선 공의 비문은 二憂堂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집에는 심익선공의 碑文과 부인 청송심씨부인의 墓誌銘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대의 文臣들이 대다수 많은 墓誌銘 墓碣銘을 남겼던 風潮에 비하면 이우당 선조께서는 묘비명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우당 선조는 처가에 관심을 가졌기에 빙부의 묘비명은 특별히 지었던 것이라고 본다.

 

나아가 이번 내가 찾은 평택임씨 부인의 비문은

이우당 선조께서 처가 만이 아니라 외가에도 극히 관심을 표력한 것이라 본다.

또한 이 평택임씨 비문 내용에 <휴암의 신도비를 세운 여력으로 임씨부인의 묘비를 세운다>라고 언급하셨다. 이 내용을 통하여 휴암 백인걸 선생의 신도비 건립에

이우당 선조께서 깊게 관여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심익선 공의 墓誌銘은 석조 1매와 백자로 제작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박물관에 들어와 각각 소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조 묘지는 뚜껑까지 갖춘 大作이며 마치 고려시대 석재 묘지명을 방불케한다.

또 백자묘지는 청화백자로 제작한 것으로 모두 두 벌인데

하나는 심익선공과 다른 하나는 배위 南陽洪氏부인의 것이다.

이 남양홍씨부인은 바로 병자호란 때의 三學士 중의 한 분인

洪翼漢의 따님이시다.

출토지가 장단이라고 카드에 적혀 있는데 다른 도굴품들과 함께 입수되며 혼돈이 생긴 것이 아닐까 여겨 본다. 즉 도굴.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책에는

13대조이신 昭敏公(조존성) 先祖의 빙부 이신충李藎忠 공의 碑碣銘도 있다.

이신충공의 자손 중 한 분이 바로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임도 알 수 있다.

또하나 竹川 相公(조정 趙挺)의 아드님 有恒에게는 족보에 누락된 따님이 한 분 있었는데

바로 黃海道觀察使 朴純의 부친 朴守文임도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는 다음 족보에 반듯이 수록할 사항이다.

 

2013년 829일 목

수원백씨 문경공파 종회에 휴암선생(문경공 휴암 백인걸)의 신도비문, 휴암의 첫부인 임씨 부인의 묘비문 사진과 번역문을 보냈다. 11대조께서 휴암선생의 증손 홍일弘一의 사위인데 최근 발간된 족보에 그 아들의 사위 즉 손녀사위로 잘못 나오는 것을 시정하려고 알려주는 전화 후에 취한 조치이다. 첫번에 이어 두 번 세 번째 보낸 메일 내용 그리고 두 번째 매일에 답신온 것도 포함하여 아래와 같다.

 

그냥 참고로 보내드립니다.

사진

1. 휴암 선생 신도비명 탁본

2. 조희석 묘소 및 묘비 사진(묘비에 증정경부인 수원백씨)*조희석은 진사 합격이며, 괴산군수 재임시 과로로 순직하심. 묘소 천안 북면 납안리이며 묘비와 별도로 신도비도 있음

 

 

조원교 씨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귀하와 같이 관심을 갖고 선조에 대한 고찰을 하다보면 귀중한 자료를 확인하고 또 수정도 할 수 있고 비록 타성이지만 선조께서 연을 맺으신 수원백씨와도 친밀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차후라도 관련한 좋은 자료 있으시면 연락 바랍니다. 차기 족보 제작시 꼭 반영하겠습니다. 귀하에게 건승하심을 기원합니다.

수원백씨 휴암종중 종무국장 백충현

 

 

사진을 다시 보내드립니다.

휴암 선생의 부인(임씨) 묘비문에 남편 신도비의 건립 연도가 명확히 나오네요. 그리고 신도비문 내용중에 이 신도비믈 세운 주축 홍일 홍우 님이 나옵니다. 바로 저히 선조(조희석)의 빙부(장인)되시는 분(홍일 님). 백씨 할머니는 역대 할머니 중 최장수 노인이셨어요. 부군은 일찍 돌아가셨어도 아들 손자의 영화를  10) 지켜보았어요.

이우당(태채) 십대손 원교 올림

 

10)조희석의 부인 수원백씨의 아들 5형제 중 4명이 문과 급제하였고 아들 좌의정 조사석, 손자 영의정 조태구, 우의정 조태채, 좌의정 조태억, 증손 우의정 조도빈 역임하였다. 
 

백인걸(白仁傑, 연산군 3, 1497- 선조 1, 1579)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학자 · 문신.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주거지는 서울과 파주이다. 아버지는 왕자 사부(王子師傅) 백익견(白益堅)이고, 어머니 단양우씨(丹陽禹氏, 명종 1년 1546년 3월 별세))는 사직(司直)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고, 송인수(宋麟壽) · 유희춘(柳希春) ·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이(李珥) · 성혼(成渾)는 그가 고향 파주 우계에서 기른 제자이다. 중종 26(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32(153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우참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적석리(積石里, 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 26))에 있고 그 아래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남평의 봉산서원(蓬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첫째 부인 평택임씨(平澤林氏)는 생원진사 임말손(林末孫)의 따님이며 장남 유공(有恭)을 낳았고, 둘째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초지만호(草芝萬戶) 안찬(安瓚)의 따님이며 아들 현령 유항(惟恒) 승지 유함(惟咸)을 낳았다. 10)

 

10)휴암 백인걸에 관하여는 문집 휴암선생문집 연보에 상세하게 나온다.

 

조태채(현종 1, 1660-119- 1722115)

유량幼亮 이우당二憂堂 우파牛坡이다. 부친은 괴산군수 희석, 어머니는 수원백씨 군수 백홍일(휴암 백인걸의 증손)의 따님. 숙종 12(1686)27세 때 文科에 급제한 이후 承文院 正字 著作 博士 奉常寺 直長 成均館 典籍 直講 司憲府 監察 兵曹佐郞 沃溝縣監(옥구향교 앞에 선정비 전하고 있음) 사헌부 持平, 慶尙左右道暗行御史, 홍문관 修撰 校理, 사간원 正言, 侍講院 文學, 知製敎, 檢討官, 吏曹佐郞, 同副承旨, 掌隷院判決事, 忠淸道觀察使, 工曹叅議, 大司諫, 刑曹叅判, 平安道觀察使, 吏曹叅判, 大司憲, 漢城府右尹 兼 同知經筵事, 都承旨, 戶曹判書, 守禦使, 工曹判書, 兵曹判書, 戶曹判書, 判義禁府事, 吏曹判書 兼 守禦使, 戶曹판서, 禮曹판서, 兵曹判書, 漢城府判尹, 議政府 左叅贊, 判義禁府事, 兵曹判書. 冬至使, 吏曹판서, 工曹判書, 賑廳 堂上, 右議政, 判中樞府事, 사은사(景宗 一年) 노론 사대신으로 세제(훗날 영조) 책봉과 대리청정 주청을 하자 소론의 극렬한 모함을 받아 경종 1(1721)1212일 전라도 진도군으로 유배가는 어명을 받았고 이듬해(1722) 1029일 사사 어명으로 115일 진도에서 사약을 받고 순절하였다. 이후 영조 1(1725)3官爵이 복구되었고. 44일 시호 충익(忠翼)을 받았다. 과천 사충서원(두 차례 이건되어 현재 경기도 하남시상산곡동 100-2번지)과 진도 봉암서원(훼철되었으며 그 터는 진도읍 동외리 당동(동외리 595번지 일대)에 배향되었다. 순조 3(1803)8월 어명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의 특전을 받았다. 사충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된 48곳 가운데 하나이다.

 

 

 

 

증정경부인 평택임씨 묘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 휴암동산 내 (같은 번지 안에 휴암 백인걸 공내외 묘소와 신도비도 있다, 조원교 촬영 .

 

 

 

 

2002년 5월 19일 앞면 탁본(조원교 소장)
 

 

2002년 5월 19일 뒷면 탁본(조원교 소장)
 
양주군과 양주문화원 공동 발간,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Ⅰ>과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Ⅱ>, 1998년 12월 30일.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Ⅱ>, pp.533-535
 
 

 

 

 

휴암 백인걸과 평택임씨와의 혼인 기록, <휴암선생문집> 내 연보, 1876년, 30.3&times;20.4cm, 조원교 소장,
 

 

?휴암선생문집? 내 연보 내 백인걸신도비 기록 1 이 기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백인걸의 신도비를 세울 때 백인걸의 사위인 의녕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의 손자 이시매(李時楳)가 전라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산석(礪山石)을 갈아서 가져왔고 숙종 계사(숙종 39, 1713년)에 백인걸의 증손인 군수 백홍일의 외손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석역(돌 공사)를 주장하였으며, 별좌 백인호(백인걸의 형)의 오세손인 충장공 백시구 황해도절도사가 두텁게 비용을 도와서 신도비문을 새겨 세웠다. *의녕감 이윤조는 조선 2대 국왕 정종의 현손(4대손)이다. 의녕감은 종친으로 받은 작호인데 나중에 도정(都正)으로 승호되었다. 그 세계는 정종의 제 사남 宣城君 李茂生-陶城守 李千丁-復興正 李眉壽-의녕도정 이윤조. *여산석은 전라도 여산부 천호산에서 나는 흰 돌이며 속칭 여산석이다. 이 돌은 대리석으로도 알려졌는데 일찍이 양호(兩湖; 호남 호서)에서 비석의 최상급 비신(碑身)으로 알려져 애용되었다.
 
?휴암선생문집? 내 연보 내 백인걸신도비 기록 2 우암 송시열이 지은 백인걸신도비문의 말미이다. 신도비문을 백인걸의 증손인 장령 백홍일(조태채의 외조)와 좌랑 백홍우가 송시열을 찾아 와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고 하니 글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있다.
 
 
986년 구산(九山) 송공호(宋貢鎬)가 글을 지은 &lsquo;영인본 이우당문집(1987년 발행)&rsquo;의 해제(解題) : 한학자 송공호의 친필이다. 이 글 안에는 이우당 조태채가 외선조 휴암 백인걸 신도비의 건립은 물론 묘전(묘답)을 마련한 것도 들어 있다./ 구산 송공호는 양주조씨이우당공파보 서문도 지은 바 있다.
 
 

 

 
 

 

휴암 백인걸과 부인(계배) 순흥안씨 내외 묘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 휴암동산 내(조원교 촬영)
 
뒤는 백인걸의 조부 백사수(白思粹(승문원 참교)의 묘소이다.
 

휴암 백인걸 묘소 아래의 신도비각 이 안의 신도비는 숙종 39, 1713년 세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 휴암동산 내(조원교 촬영)

 

백인걸 신도비 탁본(앞면과 좌측면) 신도비는 1713년 세움(글 송시열, 전서 글씨 김수항. 전서 이외 모든 글씨 송준길), 신도비 비신 180/90/25.5cm, 이 탁본은 조동원趙東元,편저編著, 增補 韓國金石文大系 卷5, 1988년, 익산 원광대학교 출판국 圓光社 발행, p.204 전재&nbsp; 번역문 파일은 첨부

백인걸 신도비 탁본(뒷면과 우측면) 신도비는 1713년 세움(글 송시열, 전서 글씨 김수항. 전서 이외 모든 글씨 송준길), 신도비 비신 180/90/25.5cm, 이 탁본은 조동원趙東元,편저編著, 增補 韓國金石文大系 卷5, 1988년, 익산 원광대학교 출판국 圓光社 발행, p.205 전재, 번역문 파일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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