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삼인은 공동으로 지난 1995년부터 1999년 약 5년 여에 걸쳐(현장 조사는 주로 주말 포함 휴일)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하여 무단 파괴된 문화재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차원, 문화재 조사 연구 수호 차원, 애국 선열의 뜨거운 의거 의혈 투쟁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던 차원에서 출발하여 조선 왕실의 태실을 포함한 한국의 태실 태봉을 연구 조사하고 그 결과(원고와 사진)를 3책(책 이름: 조선의 태실)으로 간행한 바 있다. 주1)
이 책에 실린 전국 태실 태봉의 연구 조사 내용은 국내 최초로 소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3책 중 제 1책 안에 실린 논문<제목: 조선의 태실>은 태실에 관하여 국내 최초로 구체적이며 일목요연하게 종합하여 소개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종래 단순히 조선 왕자 태실로만 전래되던 대구시 연경동 산 135번의 태실의 경우도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사례 나아가 국내 최초로 조선 국왕 광해군 태실로 판명하여 소개한 사례이다. 이는 이 태실의 태비석에 새겨 있는 명문, 조선왕조실록, 개인 소장 태지석에 새겨 있는 명문을 연결하며 내린 결론이다. 주2)
필자를 포함한 삼인의 이 쾌거 장거는 천지신명의 도움(가호)이 있었음 물론 이려니와 우리 겨레의 애국 선열, 민족 정기도 농후하게 강렬하게 도움을 주신 것 가호가 계셨던 것임을 확신한다.
지금도 그 감격 열정은 가슴 뜨겁게 울렁거리고 있는데 반하여 그러나 우리들의 노력이 표창된 바 조금도 없고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고 망각되고 때로는 무단 무시되고 도외시되고 도용 절취되는 것이 너무나 많아 억울한 면도 많다. 이에 그 대표적 한 예 광해군 태실을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주3)
주1) 조선의 태실이란 제목의 책의 안에 실린 태실 태봉의 목록은 마한 유민의 블로그 티스토리에도 실려 있다. 제목 조선의 태실(1999년 6월 30일)
주2)광해군 태지석은 두 개의 백자태항아리와 함께 개인 소장(현재 용인대학교 박물관 소장)이며 국가 지정문화재(보물 제 1065호)이다. 이들은 1991년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될 때는 물론 조선의 태실이 발간되는 1999년 6월 30일 이전 그 누구도 광해군 태지와 태항아리인지 모르고 있었다. 1999년 6월 30일 발간한 조선의 태실이란 책을 통하여 최초로 광해군 태실, 광해군 태지를 연결하고 규명한(밝혀낸) 것이다
주3) 필자가 그동안 진행한 조선 왕실 등 우리나라 태실 태봉의 연구 조사 목록 역시l 마한 유민 티스토리 블로그에 수록하였다. 즉 조선 왕실 등 우리나라 태실 태봉의 연구 조사 목록<(마한 유민의 원고/(2023년 4월 11일 발표)>
<17.光海君 胎室 (22컷)
1)태봉:대구시 硏經洞 (산 135번지) 태봉산(또는 태실봉)
2-1)태실:모두 태봉의 정상과 그로 부터 약간 왼쪽으로 내려간 비탈에 파괴 분산된 채로 있다.
2-4)태실의 蓮葉石 2-5)蓮葉石의 底面 3-1)가봉 이전 왕자 때의 태비:王子慶龍阿只氏胎室
4-1)가봉된 태비 등:萬曆 三 一月日 建 4-2)가봉된 태비의 細部 4-3)가봉된 태비의 細部
4-4)가봉된 태비의 細部 4-5)가봉된 태비의 龜趺 4-6)가봉된 태비의 螭首
5)胎誌:보물 제 1065호 (李 鶴 소장),21.0*21.0*5.7
태지:선조 8(1575)년-선조 14(1581)년
皇明萬曆三年四月\ 二十六日卯時生\ 王子慶龍阿只氏胎\ 萬曆九年四月初\
一日癸時藏(前)
6)태항아리(백자):보물 제 1065호 (李 鶴 소장),高 35.2\25.1
7)璿源系譜紀略에서의 光海君기록;선원계보기략이란 역대 조선 왕실의 왕족의 계보를 간략하게 엮은 책,대략 국왕의 4-5代까지만 嫡庶의 순서로 기술하였다.
8-1)광해군과 부인 柳氏의 묘소: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산 59(赤城洞),
사적 제 363호,비석 高 199
9)대구 桐華寺에 시주한 국왕 재위시 광해군 내외 옷:광해군의 옷 안자락에는 乙亥生朝鮮國王壽萬歲,안고름에는 乙亥(1575년)生主上殿下壽萬歲란 기원이 적혀 있다.광해군 妃 柳氏의 옷 안자락에는 丙子生中宮柳氏命衣無病萬歲身如金剛千靈雪消萬福永昌所願如意心身安寧聖神孫繼繼承承이란 祈願이 적혀 있다.
10)成墓:사친 恭嬪金氏의 묘소:진건면 송릉리 산 55 (웃송릉),사적 제 365호
이 태실의 중동석은 국왕의 태실에서의 것이다.또 태비 2에 龜趺가 들어서 있고 또 태비 명문에 ‘태비 세움’을 ‘建’으로 씀도 역시 국왕의 태실에서만 사용한 글씨이다.보통의 왕자녀들은 태비에 龜趺를 장식할 수 없다.또 ‘태실 세움’을 ‘建’이 아닌 ‘立’이라고 기재한다.
그렇다면 이 태실은 과연 어느 국왕의 태실인가.이는 이곳의 태비와 같은 명문을 가진 李鶴씨 소장 태지를 상호 비교함으로써 밝힐 수 있다.즉,1575년생으로서 등극한 국왕이므로 자연히 광해군의 태실인 것이다.결과 자연히 慶龍도 광해군의 아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비 1은 광해군이 태어난 뒤 여느 왕자의 태실로서 이곳에 들어서게 될 때 세운 것,태비 2는 광해군이 선조대왕의 嗣王으로서 국왕으로 등극하자 태실을 가봉할 때 세운 것이다.가봉은 아래 光海君日記를 통하여 볼 때 즉위 당년에 있었다.
<傳敎하기를,“태실을 개봉할 때의 관상감 제조 이하 여러 관원 및 여러 匠役들에게 논상을 차등있게 하라.”하였다.더러는 가자하고,더러는 말 혹은 쌀 면포를 내려 주었다.>
광해군일기 원년 12월 19일
그리고 아래 기록은 광해군의 태실 가봉 役事가 대구에서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동시에 이 役事 결과 시행된 논공행상이 조정에 물의를 빚었음도 알려 준다.같은 기록은 동년 12월 23일-26,28-29일과 3년 9월 30일의 기록까지 이어지고 있다.역군을 줄여 공사를 마침은 당연한 관원의 임무인데도 이를 기하여 관작과 표창이 지나치게 많이 시행된 것을 탄핵한 것이다.광해군은 이 탄핵을 물리치고 論功行賞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行 대사헌 金尙容이 아뢰기를,“신이 선공감 제조로 지난번 대구 지역의 태실 役所에 있으면서 都差使員과 監役官 등이 형편에 따라 일을 해냈는데 역군을 그전에 비하여 줄여 써서 4분의 3의 인원으로 큰 역사를 성취시키는 것을 보았읍니다.관상감 제조 李好閔과 예전의 謄錄을 참고하여 본 대로 연명하여 狀啓하였습니다.그런데 지금 간원이 安熹등의 賞加를 개정하도록 하는 계사를 보니 ‘제조가 과장되게 장계하여 사실보다 지나친 내용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賞加와 승진의 은전이 있게 했는데,물정이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신은 본래 변변찮은 자질로 드러나게 비난과 탄핵을 당하였으니,뻔뻔스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읍니다.신의 직임을 파면하여 내쫓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해군일기 원년 12월 22일
<사간원이 <충청 수사 이간을 파직시키고,胎室을 改封할 때의 도차사원 안희 등에게 賞加한 일을 개정하도록 청하고,> 정종명의 상소를 봉입한 담당 승지를 파직하고 <동참한 승지를 아울러> 추고하도록 하는 일을 연계하니, <이간은 체차하고,賞格 및 승지에 대한 일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해군일기 원년 12월 26일
그런데 아래 기록을 보면 위의 광해군의 태실을 가봉할 때 사용한 석재가 균열을 보여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관상감 제조 李好閔과 선공감 제조 김상용이 아뢰기를,“大丘 태실의 석물을 배치해 설치할 때 신들이 제조로서 감독했습니다.그때 각종 석물을 제조하는 일이 이미 완료되었는데,그 가운데 標石은 硏磨되어 글자를 새기는 일이 끝난 상태였습니다.신들이 나아가 한번 더 손으로 만져 보며 살펴 보았더니 돌의 품질이 꽤 순수하고 단단하며 精緻하였습니다.그런데 지금 듣건데 바로 그 돌에 틈이 갈라진 흔적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신들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괴이하게 여겨지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그러나 일을 치밀하게 감독하지 못한 죄는 신들이 실로 져야 할 것입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해군일기 2년 9월 10일
<사헌부가 아뢰기를,...賞典을 남발하는 정도가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읍니다....대구 부사 安燾가 守土官으로서 胎封을 修改할 때 비록 조금 분주하게 애를 쓴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직분상 당연히 할일을 한 것에 불과한데..堂上의 중한 加資까지 내림으로서 ...> 광해군일기 3년 9월 30일
광해군은 廢主이다.또 그의 태실은 역대 왕실에서 여느 국왕 태실과 같이 관리한 것도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때까지 그의 태실은 이처럼 어느정도 그 위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태실은 태비,중동석 모두 혹독한 파괴를 받았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파괴는 일제시대 때 이 태봉산의 山主들이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고의적으로 자행된 것이라 한다.결국 해방후 이 태실은 더욱 묻혀졌으며 국왕의 태실이 아닌 선조대왕의 왕자 태실이라고 전하여 오기도 하였다.
한편 이 태실은 4년전에 누군가가 이 석함을 파내려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고 전한다.아마 태지와 태항아리 등이 도굴되었으리라고 본다.
위치 제보:李重勳(24):연경동 464,李建熙(55):연경동
光海君:선조 8(1575)년 6월 6일-인조 19(1641)년 7월 1일,재위 1608-1623년 .
조선 제 15대 왕.선조대왕의 왕자,恭嬪金氏의 소생,妃는 판윤을 지낸 柳自信(본관 文化)의 따님이다.휘는 琿,1592년 임진왜란 초 세자에 책봉되어 分朝(戰時 광해군의 임시조정)를 맡아 전국의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1608년 왕위에 올라 재위 15년간의 치적은 대단히 컸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 良田을 실시하였으며,궁궐을 수축하였다. 명나라와 後金 사이에 능란한 외교솜씨를 보였으며,국경방비에 힘썼다.新增東國輿地勝覽,龍飛御天歌,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國朝寶鑑,宣祖實錄 등을 편찬하였으며,茂朱 赤裳山城에 史庫를 설치하였다.그러나 광해군은 대북파의 책동에 빠져 패륜행위를 하여 西人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폐위 당하였다.
恭嬪金氏:명종 8(1553)년 10월 11일-선조 10(1577)년 5월 21일
선조대왕의 後宮,광해군을 낳았으며 향년 25세로 요절하였다.광해군은 즉위 후 2(1610)년 永禧殿을 恭嬪의 廟堂으로 삼아 奉慈殿이라 이름지었고,묘소를 成陵이라 격상하여 治山하였으나 그가 폐위되자 다시 이 묘소는 成墓로 降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