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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태인현감 조규순(趙奎淳) 선정비의 연구 조사(2023년 6월 8일)

조원교 2023. 8. 4. 21:48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의 조선시대 태인현 지역 역사문화유산 조사’<20081117()21(), 2009413()18(), 동년 78()10(), 동년 1113>에 참여하였다. 이 때 조선시대 태인현의 읍치(관아가 자리한 곳, 치소)였던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도 조사하였다. 주1)

이곳의 많은 역사문화유산 가운데 정자 피향정披香亭(1)의 주2)  북쪽 담장 안에는 선정비, 공적비 들이 있다.<(2)-(4)>(11) 이 비석들 주3) 중 필자의 눈에 먼저 든 비석 3기는 전라 감사(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풀어 역대 전라 감사 중 가장 유명하고 일화를 많이 남긴 전라도 순찰사 주4)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비석, 주5)  주6)  태인현감 조규순<趙奎淳; 1799-1868, 태인현감 재임 기간 1841 8 5일- 헌종 11(1845) 2 25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의 비석(도4), 주7) 태인군수 홍범식<洪範植; 1871-1910년, 태인군수 재임 기간 1907 7 11일-1909 4 26일)의 주8) 비석(도3) 이다.

주1)이 조사의 결과 보고의 일환으로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 역사문화유산조사보고, 500 여년의 마을 약속, 태인 고현동 향약’(전시기간: 20091027()2010131())을 열었고, 관련 책을 20091027 󰡔역사문화유산조사보고, 500 여년의 마을 약속, 태인 고현동 향약󰡕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의 원고 가운데 고현동 향약 부분은 이효종 학예연구사가, 역사문화유산 부분은 필자가 각각 작성하였다.

주2)피향정披香亭 통일신라시대 때 태산군(泰山郡;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의 태수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피향이란 향기를 걸친다 입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향기란 피향정을 둘러싼 연못(蓮池)에 심은 연꽃이다. 물론 이 연못도 태산 태수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한다. 피향정을 중심으로 두 연지가 있어 상연지 하연지로 불렸는데 지금은 하연지만 남았다. 연못은 이전부터 있었으나 아래 연못은 현감 오언부(吳彦傅, 재임 175010- 17531)가 새로 판 것이라 한다. 󰡔태인현지󰡕에 상연지는 둘레()1,444척이고, 깊이가 2척이요. 하연지는 둘레()1,026척이고 깊이가 4척으로 나온다.
 
주3)이외 남쪽 담장 너머(태창리 68-6번지)에는 태인현감신잠선정비(전북 문화재자료 제105))가 있다. 신잠에 관한 필자 원고는 1. ‘탁월한 선정으로 태인의 수호신이 된 신잠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신문, 200921), 2. ‘청백리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潜)의 발자취를 찾아뵌 날들’(마한유민, 2020525)이다. 모두 마한유민 티스토리블로그에 실려 있다.
 

주4)순찰사란 조선 시대에, () 안의 군무를 순찰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각 도의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주5)이서구 전라도관찰사 재임 기간은 순조 20(1820)319-순조 22년 윤삼월 17
 
주6)<판중추부사 이서구(李書九)가 졸하였다.. 유소(遺疏)에 이르기를, "신은 구마(狗馬)와 같은 천한 질병으로 여러 달 동안 고생하여 실낱같이 남은 목숨이 조석 사이에 끊어지려 합니다. 나라를 근심하는 일념이 간절해 마지않아 비록 함휼(銜恤)하는 중이나 차마 한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 감히 죽음에 임해 상소하는 것을 본받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지(聖志)를 분발하시어 도모해 다스리기에 힘쓰시고, 어진 선비를 널리 뽑아 저궁(儲宮)을 보도(輔導)하며, 먼저 궁부(宮府)를 바로잡아 재용(財用)을 절약해서 민력(民力)을 아껴 양성하고, 멀고 가까운 곳을 같이 보아, 준재(俊才)를 모아서 인심을 매어두소서. 무릇 이 네 가지를 깊이 궁리하여 잘 미루어서 행하시면 나라 일을 해나갈 수가 있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 때문에 말까지 폐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비록 지하로 돌아가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수가 있겠습니다. 신은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막혀 말을 이루지 못하고 종이에 임하여 눈물만 흘리면서 애련(哀戀)해 함을 금하지 못하고 삼가 소()를 남겨 아룁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전년 겨울에 그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은 그의 정력이 강건하여 오히려 쓸 날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막 큰 일을 당하여 뒤따라 서거(逝去)할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는가? 문학(文學)과 정사(政事)를 이 대신처럼 갖춘 자를 어디서 구하랴! 내가 반드시 한번 임용하려고 고심한 것도 이제 허사가 되었다. 더군다나 유소(遺疏)를 보건대, 우국 애민(憂國愛民)의 정성이 죽음에 임해서 더욱 간절했으니, 감탄하고 슬퍼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졸한 판부사 이서구의 성복일(成服日)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조부(弔賻) 등의 절차를 예에 의해 거행할 것이며, 녹봉(祿俸)3년을 한정하여 실어 보내고, 그 아들은 복제(服制) 벗기를 기다려서 조용하라." 하였다. 이서구는 종실(宗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후손으로 젊어서 서유린(徐有隣) 형제와 잘 지냈는데, 을묘<정조 19, 1795> 국세(局勢)가 일변하기에 이르러서 지론(持論)이 아주 달라졌으니, 그 본말을 아는 자들은 그의 강팍한 성품을 의심했었다. 경신<정조 24, 1800)> 5월 그믐의 연교(筵敎) 후에 곧 한 소장(疏章)을 올려 환롱(幻弄)을 부리고 음험한 마음을 품었으니, 온 세상이 놀라고 미혹하였다. 병인년<순종 6, 1806>) 경화(更化)로 조정 의논이 용납하지 않아 향리로 물러간 지 오래었는데, 폐해진 데서 일으켜 배상(拜相)되었으나 힘껏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대개 그는 문학(文學)이 정련(精鍊)하고 경술(經術)이 엄아(淹雅)하였으며, 사무를 잘 처리하고 재식(才識)이 뛰어났었다. 더욱 염약(廉約)으로 일컬어져 민망(民望)이 따랐기 때문에 임금이 그의 허물을 씻어 진용(進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간항(簡亢)하고 자고(自高)하여 허여(許與)한 자가 없는 것이 그가 패()하게 된 원인이었다.> 순조실록 25(1835)102
 
 
주7)승정원일기에서 조규순의 관직 일부 이력을 옮겨 적으면 184185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어 헌종 11(1845)225일까지 근무, 1845113일 함양군수 임명, 1849617일 장흥부사 임명이다.
 
주8)홍범식은 태인현감에 이어 1909427일 금산군수로 임명되었다가 19108월 망국의 소식을 듣자 통분을 안고 관아뒷산에 올라 1910829일 순국하였다. 금산군수 홍범식 순절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산46-1에 있다.
(도1)정읍 피향정 보물 제 289호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4-2번지 2009년 7월 8일 촬영
 
2008년 11월 18일 촬영

 

2009년 4월 14일 촬영
2009년 4월 14일 촬영
 
2009년 4월 14일 촬영
(도2)정읍 피향정 북쪽 당장 안의 비석들 태인면 태장리 102-2번지 왼쪽 맨 끝이 조규순 선정비, 맨 오른쪽이 홍범식 선정비. 홍범식 선정비의 옆은 순찰사 이서구(李書九) 선정비이다. 2009년 4월 14일 촬영
 
(도4-1)조규순 선정비 고종 30(1893)년 2월 다른 비석과 달리 고급 석재이다.2008년 11월 19일 촬영 본래 이 비석은 이 언저리에 있을 때 여러 비석 중 가운데에 위치했었다. 그런데 2008년 직전 이곳으로 모두 이전할 때 에는 이처럼 귀퉁이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2008년 11월 19일 일기)
(도4-2)조규순 선정비 앞면 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 縣監趙侯奎淳永世不忘碑 2009년 4월 14일 촬영
 
(도4-3)조규순 선정비 뒷면 癸巳(1893년)二月 日子秉甲以古阜郡守建閣改竪 <고종 30(1883)년 2월 어느날 아들 병갑이 고부군수로써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고쳐 세운다. (이 초록색 부위는 조병갑 군수 때 추각한 것임)> 2009년 4월 14일 촬영
 
 

이 중에서 조규순의 선정비(4)를 세운 시기, 조규순의 선정의 유무 등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비석의 글씨는 앞면 縣監趙侯奎淳永世不忘碑 뒷면 癸巳二月 日子秉甲以古阜郡守建閣改竪이다. 이 해석은 앞면 글씨의 뜻처럼 ‘(태인)현감 조규순의 선정, 공적, 공덕을 길이 오래도록 잊지 못함을 표현한 비석이다. 세운 시기는 18932월 어느날 아들 병갑이 고부군수로써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고쳐 세운다.’로 보면 현재의 비석을 세운 시기는 1893년에 고쳐 세운 것이므로 그 이전에 1893년에 교체된 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흔히 1894년 갑오동학혁명운동의 주9)  출발, 도화선이 된 조병갑 고부군수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세웠다고만 전한다. 필자는 뒷면의 글씨(특히 연월일)를 바탕으로 이를 부연 설명하고자 한다.

 

조규순의 선정을 기리며 처음 세운 비석은 조규순이 태인현감 직에서 함양군수로 전임되어 떠난 직후 무렵 태인 고을 백성들이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오십여 년이 지난 1893년에 이웃 고을인 고부군의 군수로 부임한 아들 조병갑이 이전에 세운 비석을 치우고 새로 세웠으니 바로 현재 남아 있는 비석 즉 두 번째 세운 비석이다.

만약 현재의 비석이 처음 세울 때의 비석이라면 그 당시의 연월일과 1893년 고쳐 세울 때를 추가한 연월일이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추각한 사례는 함양에 전하는 함양군수 조규순 선정비이다. 즉 함양의 조규순 선정비에는 두 연월일이 있으니 처음 비석을 세울 때인 18498월 일과 아들 조병갑이 고쳐 세울 때인 고종 23(1886)7월 군수로 와 근무한지 10월 일이다. 즉 함양군수 조규순 선정비석은 1849년 비석에 1893년에 추각한 비석이다.

태인현감 조규순 선정비를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비석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고부와 태인이 바로 이웃 고을인 것 그리고 고부군이 혁파되고 그 관할 지역이 대부분 정읍군(후에 정읍시)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석 뒷면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가렴주구한 사례(비석과 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과도하게 각출하고 착복하였다는 내용)로만 몰아붙인 결과이다.

 

이 비석의 주인공 조규순의 선정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은 조규순은 분명하게 선정을 하였는데 이 역시 조규순 선정비에서 확인이 된다. 그것은 이 비석이 뒷면 병갑이란 글씨를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주10)

 

주9)갑오동학혁명운동은 1894 1 10일 전라도 고부군에서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제폭구민(除暴救民)을 기치를 걸며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침략과 궁성 점령 그리고 국정 간섭이 자행되자 이에 대항 배격하는 자주, 반외세, 반침략, 반봉건을 기치를 걸며 서울을 향한 진격전을 펼치는 데 11 11일 공주 우금치 고개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며 종료되었다.

 

주10)태인현감조규순선정비는 현재는 비신 위의 시설인 지붕이 없다. 본래 팔작 지붕이 있었을 것이다. 비석이 넘어지며 좌측 상단의 일부가 파손되고 이후 팔작 지붕도 유실된 것이다.

 

뒷면 병갑이란 글씨는 1895년 갑오동학혁명운동 때 쪼아진 것으로 보인다. 갑오동학혁명운동 때 탐관들의 선정비는 징치 대상으로 여기며 파괴하였으니 그 대표적 사례를 역대 고부군수 선정비들이 집결한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번지에 있는 군자정(君子亭) 곁의 선정비들<(6)-(8)>이다. 당시 선정을 한 군수 등의 비석이나 선정을 하지 않은 군수 등의 비석은 사진(6-1)(6-2)(7)(8)에서 보듯 매우 뚜렷하게 구분 된다.

(도5)정읍 군자정(君子亭)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번지 전북 유형문화재 제 133호 2008년 11월 19일 촬영

 

 
 
(도6-1)정읍 군자정(君子亭) 곁의 선정비들 파손되지 않은 선정비들이다. 2008년 11월 19일 촬영
 

(도6-2)정읍 군자정(君子亭) 곁의 선정비들 파손된 선정비들이다. 2008년 11월 19일 촬영

(도7)정읍 군자정(君子亭) 곁의 선정비들 중 고부군수 조용희(趙龍熙) 선정비 파손되지 않은 모습이다.(팔작 지붕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머릿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조용희(趙龍熙; 1816년생-1872년)는 고종 3(1866)년 7월부터 고부군수로 근무하다가 고종 6(1869)년 11월 황해도 서흥현감으로 전임되었다. 2008년 11월 19일 촬영
 
(도8)정읍 군자정(君子亭) 곁의 선정비들 중 고부군수 민영준(閔泳駿) 선정비 파손된 선정비이다. 민영준은 탐관의 대명사이자 친일 매국노로 널리 알려진 민영휘(閔泳徽; 1852-1935년)의 초명이다. 이 비석의 윗부분은 선혜청당상민宣惠廳堂上閔<(도6-2) 사진 안 왼쪽에서 두 번째>이다. 2008년 11월 19일 촬영

조규순이 선정을 하지 않았다면 동학혁명운동 때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선정비석이 태인에서 온전하였을 리 만무하다. 그 아들이 동학혁명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름 즉 더러운 이름을 남겼기로 아들 이름만 쪼아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행위도 동학혁명운동의 출발 기치(旗幟) 문구인 제폭구민(탐관오리의 폭정 부정 부패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신)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병갑이란 이름도 아주 극심하게 파괴하지 않고 조금은 알아볼 수 있게 쪼아냈다. 어렴픗하게라도 병갑 글씨를 남겨 탐관오리라는 사실을 영원히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규순 선정비에서 조규순의 선정 사실과 조병갑의 탐관 탐오貪汚) 사실을 후대로 계속 알리려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조규순의 선정은 다른 기록들에서도 승정원일기의 여러 기록과 태인 외에도 전하는 선정비들(7)(8)에서도 확인이 된다. 조규순(1799-1868)33세인 1831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실린 그의 관원 임명 기록들에서 전반부는 대부분 외직, 이후 요직이다. 그 친형 조두순(趙斗淳; 1796-1870)1816년 진사 합격, 1827년 문과 급제하고 승승장구하여 대제학,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니 대조적이다. 문과 급제자와 진사 합격자라는 차이,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전반부에 외직에 머문 경우가 많은 것은 아마도 친형에게조차 인사 청탁을 하지 않은 성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제법 요직에 오르게 되는 데 이는 그가 진실로 올바른 목민관임을 제대로 평가받은 결과일 것이다.

문과 무과 급제, 생원 진사 합격하면 국왕을 알현하여 사은숙배(謝恩肅拜: 임금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의미로 임금에게 절을 하는 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규순이 합격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함께 합격한 다른 합격자(생원 100, 진사 100)들과 함께 창덕궁 희정당 뜰에 들어가 국왕(헌종)에게 사은숙배하였는데 아래는 그날의 승정원일기이다.

 

<上曰, 生進肅拜爲之, 贊儀唱四拜, 生進行四拜禮上曰, 生進各五人, 以次進前, 奏職姓名, 五人連爲進前, 奏職姓名至趙奎淳, 上曰, 誰之子孫乎?奎淳曰, 故相臣泰采之五代孫矣上曰, 史官就座仍命退, 生進皆出, 諸臣以次退出

왕이 생원 진사들의 숙배를 하라 말하다. 이에 찬의(贊儀)가  주11) 사배(四拜)요 라고 창(: 가락을 넣어 부르는 소리나 노래)하자 생원 진사들이 사배의 예()를 하였다. 왕이 생원 진사 중에 각 다섯 사람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직()과 이름을 아뢰라 말하니 다섯 사람이 이어서 앞으로 나오며 직과 이름을 아뢰었다. 이 때 조규순에 아뢰러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너는 누구의 자손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규순이 돌아가신() 상신(相臣) 조태채의 오대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이관(吏官: 인사 담당 관원)은 자리로 가 앉고 이어 (나머지) 여러 사람은 물러가라고 명령하자 생원 진사 모두 나가고 여러 신하들도 순서대로 물러났다.> 승정원일기 순조 31(1831)44

 

위는 왕이 숙배하던 날 급제자 200명 중 10명을 소대(召對)하게 되었는 데 그 중 조규순에게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묻자 이에  조규순은 고(; 돌아가신) 상신 조태채의 오대손이라고 대답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날 국왕은 조규순을 처음부터 눈여겨 본 것이고 그가 충신 조태채의 후손이니 더욱 흡족하게 여기며 인사를 담당한 이조의 관원에게 조규순을 관직에 등용하라는 당부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6년 후에야 서사(筮仕: 첫 벼슬살이)한다.. 그 사이에 출사 보다도 문과(대과) 준비를 한 것인지 등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조규순의 부친 조진익(趙鎭翼; 조태채의 4대 종손)1762년생인데 경상도 진주목사 때인 순조 27(1827)918일 임지 진주에서 별세하였고, 어머니 덕수이씨는 1760년생이고 순조 12(1812)615일 별세하였다. 즉 진사 합격 이전에 부모가 이미 모두 별세를 한 상태였다.

조규순이 순조 임금을 처음 알현하고 면대하던 날에 자신을 고故; 돌아가신) 정승 조태채의 오대손이라고 소개하였다. 충신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를 계승하며 살려는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당시 조태채의 후손은 충신의 가문 사람, 충직한 후손, 충신, 충직한 사람이라는 대명사격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고 존중 예우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태채의 육대손인 조병세(趙秉世; 1827.6.2.-1905.11.5.  12.5, 좌의정 등 역임, 시호 충정忠正)를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처음 면대한 날 고종 임금이 조병세에게 말한 "경은 경의 집안 선조 이우당(二憂堂)의 충직한 절개를 가지고 있는데 경이 또 나를 섬기게 되었으니 어찌 오늘 크게 기대하지 않겠는가?"<고종실록 26(1889)년 10월 22일 기록> 등을 통하여 잘 읽을 수 잇다.

 

주11)찬의는 조선시대 통례원에 두었던 정오품의 벼슬. 통례원은 예의를 맡아보던 관청. 태조 1(1392)년 7월에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합문(閤門)을 설치하여 조회·의례를 맡아보았다. 그 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통례문으로 고쳐 태종 5(1405)년 3월에 예조에 소속시켰으며, 세조 1(1466)년 1월에 통례원으로 개정하였다.

 
주12)조규순의 아버지 조진익(趙鎭翼)은 조태채의 현손이자 종손(宗孫)이다.
 
주13-1)조태채는 조선 경종 때 노론 사대신 중 한 분이다. 노론 사대신은 사충신으로도 불리우며 경종 1, 1721-경종 2, 1722년 사이에 있었던 悲劇的 辛壬士禍 犧牲 老論 4大臣이다.  忠獻公 金昌集(1648-1722 5 2), 忠文公 李頤命(1658-1772 4 30), 忠翼公 趙泰采(1760-1722 11 5), 忠愍公 李健命(1663-1722 8, 19일 이후 어느 날)이다. 노론 사대신(사충신)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충신의 대명사로 여기며 흠앙 찬양받았다. 이것은 그들을 제향하는 사충서원(四忠書院)의 유사(有司)가 됨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그를 역임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이우성, 한국고전의 발견, 서울 한길사, 1976년, pp.445-446)이나, 전라도 고흥 선비 송정악(宋廷岳)이 남긴 서행록(西行錄)에 사충의 자손으로 부터 충효록의 글(서문, 발문)을 받아내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엿볼 수 있다.;조태채와 관련된 필자가 작성한 글 모두 마한유민 블로그에 실려 있다. 1. 2017 11 16일 촬영한 사충서원 처음 자리의 안내 표석 사진(2017년 11월 16일); 경기도 하남시 사충서원(2017년 12월 22일); 사충서원 두 번째 자리(용산구 보광동 28번지모습을 전하는 자료를 올립니다(2017년 12월 22일); 경기도 하남시 사충서원 묘정비 비문 번역문 교열(2017년 12월 22일); 경기도 양주시 휴암 백인걸 선생의 부인 평택임씨 묘비(2022년 5월 23일); 이우당 조태채의 별서 시흥 우파를 찾아서(2022년 6월 17일);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의 휴암 백인걸 낚시터(휴암조대)(2022년 6월 21일); 풍덕도호부사 심익선沈益善 부부의 묘지석(墓誌石)(2022년 10월 10일).
 
주13-1)조태채의 후손 조병세의 고종실록 26(1889)년 10월 22일 기록과  관련하여 필자가 작성한 글 ‘매천 황현의 저술 매천야록에서 읽은 충정공 조병세의 기록’(마한유민 블로그, 2021년 10월 15일 발표)>이 있다.

주13-2)서행록에 관하여 필자가 작성한 두 글은 ‘사옹원 분원에서 개인 부탁으로 묘지석을 만들어 준 사례(2019년 10월 16일 국립중앙박물관 제659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전라도 흥양현의 선비 송정악(宋廷岳)의 일기『서행록西行錄』에 있는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장례식(葬禮式)·상장례(喪葬禮)(2019년 12월 6일 마한유민 블로그)이 있다.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조규순이 지방관원으로 임명된 곳을 열거하면 한성부 남부 도사(헌종 3, 1837517일 임명), 사옹원 주부(헌종 5, 18391222일 임명), 제용감濟用監 판관(헌종 6, 18401222일 임명), 태인현감(헌종 7, 184185-1844420), 함양군수(헌종 11, 184553일 임명), 무안현감(철종 즉위년, 18491226일 임명), 수원 화령전華寧殿 (철종 2, 1851413일 기사), 수원 판관(철종 2, 1851, 413일 임명-1853.2), 재령현감(철종 4, 185326일 임명), 황주목사(철종 6, 1855, 420일 임명), 군자감 정(철종 6, 1855420일 임명-1856316), 동부승지(철종 7, 18561227), 형조참판(철종 9, 18581113일 임명), 호조참판(18581228일 임명) 동지의금부사(철종 10, 185957일 임명), 호군(護軍) 조규순(시종신으로 복무 중인 아들 조병협趙秉協으로 인하여 고종 5, 186812일 가선대부로 올림)

위 기록으로 보면 조규순이 지방 관원으로 나간 곳은 태인, 함양, 무안, 수원, 재령, 황주이다. 이 가운데 현재 남한 지역은 태인, 함양, 무안 수원이고 북한 지역은 재령과 황주이다. 수원은 판관 즉 책임 관원이 아닌 관계로 선정을 하였더라도 선정비까지는 세울 위치가 아니었을 것이다.(물론 판관 선정비가 도처에 많이 있다.) 재령과 황주는 북한 지역이기에 선정비 유무를 파악할 수 없기는 하다만 조규순이 근무한 모든 지방에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까지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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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7-1)함양군수 조규순 선정비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51-4번지(함양 상림 공원 안) 헌종 15(1849)년 8월 비를 세웠고, 고종 23(1886)년 추가 글씨 새겼음 2003년 6월 21일 촬영
 
 
 
(도7-2)앞면 郡守趙侯奎淳永世不忘碑 政先簡易 治務公平 懷我以德 徯俟其蘇 民有餘粟 軍無逋丁 五載循撫 一境歡愉 <(조규순 군수는) 정사는 간편하고 다스림은 공정하고 군민들을 덕으로 품고 백성의 위태로움을 소생시켰다. 백성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군사에 체납된 군역을 없애주었고 오년 동안 어루만져 주어 함양군 경내는 기뻐한다. 2003년 6월 21일 촬영
(도8)나주 고막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송촌리 972-4번지 등 전남 유형문화재 제 68호) 조규순이 무안현감 때 만들었다. 당시는 이곳이 함평현이 아닌 무안현에 속하였다. 무안읍지에 조규순 현감은 庚戌(1850년)二月日到任 翌年辛亥(1851년)四月日 陞移으로 나온다. 이 기록과 고막교 옆 조규순선정비 건립 년도를 통하여 (1850)년 경에 다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1월 24일 촬영
 
 
 
 
 
(도9) 나주 고막교 옆 무안현감 조규순(趙奎淳) 선정비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 112번지 앞면 현감조후규순청덕선정비 縣監趙侯奎淳淸德善政碑 뒷면 庚戌立(1850년) 2005년 1월 24일 촬영
 
태인(정읍), 함양, 함평에 전하는 조규순 선정비만으로도 조규순은 공직 생활에서 진충보국과 멸사봉공 애민선정 청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전국 방방곡곡에 탐관오리들이 많았기로 그들과 다른 조규순은 오히려 더윽 두드러지게 여겨지며 존경받고 오래 기억되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태인의 경우처럼 이임 43년 별세 27년이나 지났음에도 고을 사람들이나 동학혁명운동군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선정비의 파괴를 막은 것이 아니었을까? 고부군수 조병갑이 불과 1년전인 1893년에 고쳐 세운 비석이었음에도 1894년에 파괴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진충보국과 멸사봉공 애민선정 청백한 올바른 정신과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 출발했을까? 당연 가정의 훈육, 조상 대대로 전하는 가훈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정답 역시 앞서 소개한 승정원일기에서도 찾았다. 즉 그는 5대조 조태채의 진충보국 멸사봉공 청백리의 정신을 긍지, 귀감으로 여기고 닮고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관로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심신 깊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조규순이였기로 헌종 임금도 여러 사람 가운데 유독 그를 눈여겨 보고 특별히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태인 함양 무안의 읍지와 선정비에 실린 조규순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15) 주16)

 

15)조유순( +의 우측 ; 1808-1883)은 조규순(1799-1868) 4촌 동생(족보상으로는 10)이다. 조유순의 외아들이 조병식(趙秉式; 1832-1907)이다. 조유순도 태인현감으로 근무했는데 1880 4월 도임하여 근무하다가 1883 8월 임지(任地, 임소任所)인 태인에서 별세하였다. 조유순의 생가(生家) 계보는 오대조 문과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고조부 진사 동몽교관 조겸빈趙謙彬(조태채의 삼남)-증조부 문과 이조참판 조영순趙榮順(조겸빈의 차남)-조부 문과 홍문관 수찬 조원철趙元喆(조영순의 장남)-아버지 생원 광주목사 조진민趙鎭敏(생부 진사 의령현감 조종철趙宗喆)(조종철의 삼남)-생원 태인현감 조유순(조진민의 삼남)이다. 그의 양가 계보는 오대조 우의정 조태채-고조부 진사 황주목사 돈녕부 도정 조정빈趙鼎彬(조태채의 장남)-증조부 청풍부사 선공감 부정 조영극趙榮克(생부 조겸빈),(조겸빈의 장남)-조부 생원 조의철趙宜喆(조영극의 사남)-아버지 생원 진사 양근군수 조진강趙鎭剛(생부 의령현감 조종철)(조종철은 조영극의 장남)(조진강은 조종철의 사남)-생원 태인현감 조유순(생부 조진민)(조진민의 삼남)-아들 조병식(관찰사, 이조판서)

 

16)조규순의 간찰이 전남 옥과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0개의 유자를 선사한 친지에게 보낸 감사 답서이다.. 기유(1849) 10월이라 적혀 있다; 조규순 이름을 새긴 바위 글씨가 경남 합천 가야면 구원리 홍류동(해인사 입구, 구원리 산 1-2번지)에 있다. 이곳은 조규순의 아버지인 조진익(趙鎭翼,(생원, 진주목사)이 현감으로 있던 관내이다.<합천현감 재직, 순조 10, 1810-순조 12, 1812>. 홍류동에는 조진익과 그 세 아들<조두순 조태순趙台淳(문과, 이조참판) 조규순>, 조기순趙箕淳(생원, 예천군수) 조성순趙星淳 형제<조진익의 동생 조진정趙鎭靖의 두 아들>, 조진민趙鎭敏(조진익의 동생, 조진정의 형),, 조진민의 아들 조유순((+ )의 이름도 함께 있다. 조규순과 아들 조병갑의 묘소는 충남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평소리 산 15-5번지)에 있다.

 

 

고을 이름 선정비 명문 선정비 위치 선정비 건립 년도 읍지
태인
4)
앞면
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
縣監趙侯奎淳永世不忘碑
뒷면
癸巳(1893)二月 日子秉甲以古阜郡守建閣改竪
<고종 30(1883)2어느날 아들 병갑이 고부군수로써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고쳐 세운다. (이 초록색 부위는 조병갑 군수 때 추각한 것임)>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번지(피향정 북쪽 담장 안)
처음 건립 년도는 불명/고종 30(1893)년 새 비석을세움
비각도 건립하엿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음.
辛丑九月到任 乙巳五月移拜咸陽 <헌종 7(1841) 9월 도임. 헌종 11(1845)5월 경상도 함양으로 관직을 옮겨 임명하다.>
함양
(7)
앞면
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
郡守趙侯奎淳永世不忘碑
政先簡易 治務公平 懷我以德 徯俟其蘇 民有餘粟 軍無逋丁 五載循撫 一境歡愉
<(조규순 군수는) 정사는 간편하고 다스림은 공정하고 군민들을 덕으로 품고 백성의 위태로움을 소생시켰다. 백성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군사에 체납된 군역을 없애주었고 오년 동안 어루만져 주어 함양군 경내는 기뻐한다.>
뒷면
道光二十九年己酉八月立
季子秉甲 丙戌七月莅位十月日建閣移奉
<헌종 15(1849)8월 비를 세웠다. 막내아들 병갑이 고종 23(1886)7월 군수로 와 근무한지 10월이 되는 어느날 비석을 보호할 건물을 세우고 비석을 건물 안으로 옮겨 받들었다.(초록색 부위는 조병갑 군수 때 추각한 것임)>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51-4번지(함양 상림 공원 안)







처음 건립 년도 철종 즉위년(1849) 8/고종 23(1887)년 추각(追刻)



 
무안 앞면
현감조후규순청덕선정비
縣監趙侯奎淳淸德善政碑
뒷면
庚戌立
115, 41, 18cm
전남 함평군 鶴橋古幕112번지(원고막 마을 고막교 서쪽 제방 위)
*무안 현감 때 고막교( 전남 유형문화재 제 68) 축조
철종 1(1850)
庚戌二月日到任 翌年辛亥四月日 陞移/철종 1(1850)2월 함평군수로 옴/18514월 승진하여 옮겨감

 

태인현감
조유순( +의 우측
1808-1883
태인현감 재임 기간
철종 1(1850)년 경술 4-철종 4(1853)년 계축 8別世
조유순은 조규순(1799-1868)의 사촌 동생(종제從弟)이며 조병식(趙秉式; 1832-1907)의 아버지이다. 태인현감으로 재직중 별세하였다.

 

함양군수 조병갑선정비<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51-4번지(함양 상림 공원 안)>
앞면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
先侯之思 遺民是撫 削廩繕廨 減租蠲布 束薪政嚴 食藥心苦 牛刀二載 龜趺千古
<지난 원님(조병갑)의 생각은 백성을 어루만짐이다. 세금을 감해 주며 땔감(백성들의 세밀한 부분)까지 엄하게 생각하며 정사를 펼쳤다. 백성들의 먹을 것과 약품에 애썼고 군수로 두 해 근무하였으나 공적 실은 귀부(비석 받침 즉 공적을 새긴 비석)은 천년을 갈 것이다.>
뒷면
光緖十三年丁亥七月日
<고종 24(1887)7월 어느날 (건립)>
*승정원일기에서 조병갑은 18865월 함양군수로 임명, 1887618일 김해부사로 옮겨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조병갑 선정비는 천안 광덕과 김해 생림면에도 있다.
*조병갑의 외직 임명일은 비안현감(1882316, 천안군수(18821023, 직산현감(1885328), 보성군수(1885415), 풍기군수(188642未赴 상환 함양기), 함양군수(188652). 김해부사 (1887618~18891), 영동현감(188917일 미부, 상환 고부), 고부군수(188947, 또는 28-18931130일 익산군수로 전임이나 미부, 그 사이 機器局委員(189242) 임명, 189419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의 유임요청(留任要請)으로 조병갑 고부군수로 다시 유임(留任), 110고부농민, 봉기 고부 점령, 215일 군수 파면, 420의금부에서 조병갑(趙秉甲)을 공주관내에서 체포(逮捕))

 

참고로 피향정에는 여러 기문과 시들을 새겨 걸은 편액이 즐비하다. 이 가운데에는 조두순(趙斗淳; 조규순의 큰형)이 철종 6(1855)년에 지은 피향정기를 새긴 편액(10)과 조병식(趙秉式; 조규순의 사촌 조유순의 외아들)이 무인년<고종 15(1878)>에 피향정에서 지은 시를 새긴 편액(11)이 있다.

이 가운데 조유순(1808-1883)의 아들 조병식(1832-1907)이 지은 시를 아래에 소개하였다. 조병식은 1852년 생원 합격, 1858년 문과 급제를 하였다. 아버지 조유순이 태인현감으로 근무(1850-1853)하다 별세한 태인 고을에 20여 년 뒤 찾아와 피향정을 제목으로 남긴 시이다. 맨 마지막 무인년<고종 15(1878)>은 아버지 조유순의 생전 즉 1883년 이전이다. 따라서 맨 마지막 무인이란 간지는 착오 오기임이 분명하다. 주17) 이 시로 보건대 그는 아버지를 따라와 태인 고을에서 얼마간 같이 지냈고  주18)  아버지 별세 때에는 상례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유순이 별세한 지 20여 년 뒤는 1903년경이다. 이 무렵 조병식은 외부대신, 서북철도국 총재, 특진관 등을 지냈다..

 

주17)이 무인년은 조유순의 생전 즉 1883년 이전이다. 따라서 맨 마지막 무인이란 간지는 착오 오기임이 분명하다. 태인 피향정 시에서 부친 별세 20여 년 뒤에 와 시를 짓는다 하였기에 시를 지은 시기는 1903년경이다.

주18)이 기간 중에 조병식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거주지는 경(; 서울)이다.

 
 

此邑卽先人涖治之所也不可

無感懷略記數語以題亭云爾

蒼黃行色趁秋初 款款州人意不疎

某水某邱記前度 無情風雨卄年餘

下上沼池朝氣寒 乍游如惜別離難

此停此日無從淚 灑盡溪山一笑看

戊寅 孟秋 上澣 趙秉式

 

이 고을은 바로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현감으로 계셨던 곳이다. 감회가 없을 수 없어 대략 몇 마디 말을 기록하고 정자를 시의 제목으로 한다.

 

바쁜 행색으로 초가을을 뒤쫒아 오니

정성스러운 고을 사람들 (나를 대하는 것이) 성김이(서먹서먹함이) 없구나

아무 물(냇가) 아무 언덕은 지난날을 기록하고 있지만

무정한 세월은 이십여 년이나 흘러갔구나

 

아래 위 두 연못에 아침 기운 차갑고

잠시 이 나들이는 (산천과 사람들과의) 이별이 어렵고 아쉽구나

이 정자에서 오늘은 나의 눈물 흘림이 없으니

(지난날) 골과 산에 다 뿌리고 (오늘은) 정자를 바라 보며 웃는구나

무인(고종 15, 1878)  주17) 초가을 상한에 조병식 지음

 

(도10)피향정에 걸려 있는 조두순이 지은 피향정기(披香亭記) 편액 이 피향정기는 철종 6(1855)년에 지음. 2009년 4월 14일 촬영

(도11)피향정에 걸려 있는 조병식(趙秉式)이 지은 시를 새긴 편액 이 시는 조병식이 이곳 태인현감 재작 때 별세한 자신의 아버지 조유순 등을 생각하며 태인 피향정에서 1903년경에 지은 시 2009년 4월 14일 촬영
(도12)경남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641번지(생림면사무소 뜰)의 여러 비석들 왼쪽에서 두변째가 김해부사 조병갑 선정비이다. 앞면 府使趙侯諱秉甲永世不忘碑 一自下車 念切分憂 矯革五獘 金州有州 感淚宣息 萬民歡樂 一片留名 千古無怍 뒷면 上之二十五年戊子(고종 25, 1888년)九月 日立 비신고 140 비신폭 47 비개고 38cm, 비좌고 16 비좌폭 90 비좌두깨 70cm
 

 

(도13)김해부사 조병갑 선정비( 2003년 6월 21일 촬영)    고종 25(1888)년 경남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641번지 앞 府使趙公候諱秉甲永世不忘碑 一自下車 念切分憂 矯革五獘 金州有州 感淚宣息 萬民歡樂 一片留名 千古無怍 뒤 상지이십오년무자구월일뒷면上之二十五年戊子九月日 김해부(金海府) 생림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수확이 전무한 큰 흉년을 만나 지세(地稅) 면제를 김해부사 조병갑이 건의하자 경상도관찰사 이호준(李鎬俊)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을 거쳐 국왕의 윤허를 얻은 선정을 기념하며 김해 생림면민이 세운 비석 가운데 하나이다. 이 비석의 옆에는 당시 함께 세웠던 국왕의 은혜를 기리는 선은대 (宣恩臺) 비석(가장 큰 비석), 이호준과 심순택의 선정비가 있다. 이호준(1821년 7월 18일생-1901년 2월 28일졸)은 매국노 이완용(1858-1926년)의 아버지(양부養父)이다. 이호준에 관한 필자의 글은 ‘이호준 부인 풍천임씨 백자 묘지석’(2020년 2월 12일 발표 등록 마한유민 블로그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