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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도읍 한성부를 정하는 과정 역사 연표 1-2 -한양 천도・개성 환도・한성 환도 등- (2023년 9월 5일)

조원교 2023. 9. 6. 16:46

 

태조 3(1394)년 813

국왕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옛 서울의 성 쌓는 공사를 마치게 하였다.

816

국왕이 적성 광실원 동쪽을 탐사하였으나 국왕이 좋지 않다고 평가..

817

국왕이 임진현 북쪽에서 유숙하고, 전조(前朝)의 신경(新京) 터를 보았다. 이 역시 도읍지가 적합한지를 살펴 본 것이다.

818

민중리(閔中理; 지리를 아는 관원, 태조실록7329일 기록에 검교檢校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나옴)가 추천한 경기도 도라산을 국왕이 탐사하였으나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말하고 (송경(개경)으로 돌아왔다.

*도라산은 현재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에 있는 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장단부 안.

824

도평의사사의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이 예로부터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고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으며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고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운 새 왕조의 국왕은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인데 한양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라고 국왕에게 상신을 하엿다. 국왕이 천도지를 한양에 염두고 있음을 갈파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것을 상신하자 국왕이 이를 왕지(王旨)로 수락하였다. .

91

신도 궁궐 조성 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 전 정당 문학 이념(李恬),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99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참찬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918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의성절(聖節)을 하례하고서, (개경) 성 쌓는 공사를 돌아보았다.>

923

판삼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궁궐과 기타 도시의경영을 관리하였다.

929

(개경) 성 쌓는 인부들을 돌려보냈다.

1025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출발).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개경(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시랑 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태조실록3(1394)123일 기록에도 천도한 날을 13941025일로 기록하였다.

*1028일 한양 도착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는 개경에 또 하나의 도평의사사를 설치한 것을 뜻한다.

1028

한양 도착하여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음.

112

국왕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서운관(書雲觀)의 서리들을 인솔하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피었다.

113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에 종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장신(狀申)하자 국왕이 수락하였다.

1125

도평의사사에 명령을 내려, 백관을 무악(毋岳)에 모아서 다시 무악 천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비좁다 하여 천도 후보 논의를 제외시켰다.

123

종묘와 궁궐의 공사를 기공(124)하기 전날 국왕이 하룻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태조 4(1395)129

사직단(社稷壇)을 영조(營造)하였다

29

<을해(1395)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224

사직단(社稷壇)의 공사가 있었다

227

임금이 서봉(西峯) 밑에 거둥하여 사직단 쌓는 것을 보았다.

66

한양부에서 한성부(漢城府)로 개칭. 이 때 한양부 아전들과 백성들은 현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쳤다. 이로부터 기존 한성, 한양, 양주, 남경, 한양으로 불리던 고을이 한성부와 양주로 둘로 나누어진 것이다.(태조실록4(1395)66)

*기존 한양부의 속현인 현주사천현은 그대로 양주군의 속현으로 됨.; 이후󰡔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에는 속현이 3인데 현주사천현농양현(農壤縣)이다. 농양현은 고려시대에는 풍양현이고 포천의 속현이었다가 세종 1(1419)년 양주도호부 속현이 된 풍양현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에서 양주의 속현은 풍양현만 남고 사천현은 사천폐현으로 기록됨. 따라서 현주와 사천현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음.

*필자는 위 󰡔세종실록󰡕 「지리지농양현은 풍양현의 오기로 추정됩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세종 14(1432)년 편찬된 팔도지리지를 근간으로 문종 2(1452)년 편찬한 역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1530)년에 편찬.

*따라서 1432년 이후 16세기경에 사천현과 현주가 양주의 속현에서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 즉 서울의 명칭 변천 약사

1. 태조 3(1394)1025

개경에서 한양부로 천도를 향한 출발

2. 태조 3(1394)1028

한양부 도착

3. 태조 4(1395) 66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

4. 고종 32(1895)623<음력 윤51일부터 189684일까지> 전국 팔도(八道)를 없애고 23()로 개편할 때

*기존 한성부는 한성부와 한성군으로 나뉨. 한성부는 23부 중 하나이며 신설된 한성군과 양주군(이 때 양주목에서 양주군개칭) 등 기존 경기도 여러 군을 관할하고, 한성군은 기존 한성부를 관할하는 곳이 됨.

*또 이 때 기존 양주목은 양주군이 되고 23부 중 하나인 한성부 관할이 됨

5. 고종 33(1896)84일 반포

기존 23부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 이 때 1895년의 한성군은 다시 한성부가 됨. 이 한성부와 한성군은 경기도의 소속이 됨

5-1.. 고종 32(1895)

한성군을 한성부로 다시 승격(*이 주장의 근거를 필자는 알 수 없음. 이듬해에는 분명 한성부로 복구 됨.)

 

6. 고종 33(1896)8413도 체제 반포

23부를 113도 체계로 개편. 이 때 1895년 신설된 한성군은 다시 한성부가 됨. 이 때 양주군은 경기도의 소속이 됨

*1910101일 시행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에 편입

*1949815서울특별시로 개칭.(서울특별시 헌장 전문758조안에 서울 특별자유시로 명명

조선시대 양주의 명칭 변천 약사 1

1. 태조 3(1394)1025

개경에서 한양부로 천도를 향한 출발

2. 태조 3(1394)1028

한양부 도착

3. 태조 4(1395) 66(태조실록)

한양부 아전들과 백성들은 현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침. 즉 한양부에서 갈려 나와 양주군으로 강등됨

4. 태조 6(1397)124

양주군을 양주부로 승격)

<이상 모두는태조실록>

양주군을 양주부로 승격)

<이상 모두는태조실록>

5. 태종 13(1413)

양주부를 양주도호부로 개칭

<이상은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

조선시대 양주의 명칭 변천 약사 1-1

3-1. 태조 4(1395) 66

한양부 치소를 동쪽 마을 대동리로 이전하고 양주군으로 강등

태조 4(1395)년 양주군을 양주부로 승격

3-2. 태조 6(1397)

양주부 치소를 현주 옛터(見州 古基)로 이전

<이상 셋은 󰡔세종실록󰡕지리지,양주도호부;대동지지, 양주>

조선시대 양주의 명칭 변천 약사 2

6. 세조 12((1466)115

양주도호부를 양주목으로 승격

<세조실록 12(1466)115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 대동지지, 양주>

7. 연산군 10(1504)

양주목 폐지. 국왕(연산군)이 양주를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예속시킴)

*양주 혁파의 시기는 연산군일기11(1505)529, 71, 722일 기록을 통하여 150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음

8. 중종 1(1506)92일 중종반정 직후

국왕(중종)이 즉위(92)하며 이후 양주목이 복구됨.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

9. 고종 32(1895)623<음력 윤51일부터 189684일까지> 전국 팔도(八道)를 없애고 23()로 개편할 때

기존 한성부는 그대로 한성부가 됨. 23부 중 하나가 되었다..

기존 양주부는 양주군이 되고 한성부 관할이 됨

10. 고종 33(1896)8413도 체제 반포

23부를 13도 체계로 개편. 이 때 1895년 신설된 양주군은 경기도의 관할이 됨

 

<이상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3(1394)년 한양 천도에 이어

태조 3(1394)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쪽 마을(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로 만들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

태조 3(1394)년 부터

양주군을 양주부로 승격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1394)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한성부의 동쪽 마을(東村) 한골[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1395)에 부()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1397)에 또 부치(府治)를 현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1413)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3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

*󰡔세종실록󰡕 「지리지는 세종 14(1432)년 편찬된 팔도지리지를 근간으로 문종 2(1452)년 편찬한 역사지리지.

태조 3(1394)년 부터

<건치 연혁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현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1018)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1394)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쪽 마을(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로 만들었다. 6(1397)년에 또 부치(府治)를 현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14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1466)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을 설치하였다. (이하 생략)>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

태조 4(1395)613

개성부(開城府)를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고치다. 유후(留後)ㆍ부유후(副留後)ㆍ단사관(斷事官)ㆍ경력(經歷)ㆍ도사(都事)를 각각 1명씩 두고 개성현(開城縣)을 없앴다

*당시 서울인 개성은 충렬왕(忠烈王) 34(1308)년 무신년부터 개성부로 불렸다.

929

이 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는 종묘이고, 새 궁궐은 경복궁이다.

913

처음으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어 판사·부판사·(使부사(副使판관·녹사 들을 임명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한성부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927

새로 지은 한양 종묘에서 첫 제사를 지내기 앞서 국왕이 새 대궐에서 재계(齋戒)하였다.

928

백관이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개경 종묘에서 옮겨 오는 신주를 봉영(奉迎)하여 새로 지은 한성 종묘에 안치하고,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하였다.*반송정: 서울 돈의문(서대문) 밖 반지(盤池) 옆에 있었던 정자 이름

105

새벽에 국왕이 한성 종묘 창건 이후 첫 제사를 지냈다. 이날 새벽 이전에 지은 죄 중에 상사(常赦)로써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한 이죄(二罪) 이하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안 된 것이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는 교서를 오문(午門; 광화문) 앞에서 반포하였다.

107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경복궁)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오문, 정문의 이름은 태조실록4(1395)929일 기록에 나오기는 하지만 사실은 뒤(세종 8, 1426)에 광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1229

국왕이 이조에 명하여 한성부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태조실록4(1395)1229

태조 5(1396)1152월 그믐(29)

태조 5(1396)813930(그믐)

세종 4(1422)1152

<도성(都城)의 둘레가 9975()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3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1396)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8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7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9431명을 모아서 8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1422)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2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이하 생략>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세종실록󰡕 「지리지1432년 편찬된 팔도지리지를 근간으로 1452년 편찬한 역사지리지)

*금상: 세종

태조 5(1396)419

도성 5부 아래 52방을 두다. 한성부로 하여금 5(五部)의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하였다. 동부가 12()이니 연희(燕喜숭교(崇敎천달(泉達창선(彰善건덕(建德덕성(德成서운(瑞雲연화(蓮花숭신(崇信인창(仁昌관덕(觀德흥성(興盛)이요, 남부가 11방이니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태평(太平훈도(熏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이며, 서부가 11방이니 영견(永堅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인지(仁智황화(皇華취현(聚賢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이고, 북부가 10방이니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정(鎭定순화(順化명통(明通준수(俊秀의통(義通)이며, 중부가 8방이니 정선(貞善경행(慶幸관인(寬仁수진(壽進징청(澄淸장통(長通서린(瑞麟견평(堅平)이었다.

태조 5(1396)813

왕비인 현비(顯妃 즉 신덕왕후 강씨)(환자宦者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별세.

태조 6(1397

양주부의 치소(治所)를 한양부 동쪽 마을(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양주군으로 고쳤다가 태조 4(1395)년 양주부로 승격, 태조 6(1397)년 양주부 치소를 현주 옛터(見州古基)로 옮김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대동지지, 양주)

태조 6(1397)

양주부의 치소를 동쪽 마을 대동리에서 현주 옛 터로 옮김(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목)

*이 현주 옛 터는 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고읍리 안이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안 고읍리이며 흔히 고주내(古州內)로 불리는 곳이다. 연산군 때 양주가 폐읍되었다 중종 때 복읍할 때 치소(治所)를 구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로 이전하였는데 현재 양주시 유양동 506번지이다.

태조 6(1397)111

신덕왕후 강씨가 도성 안인 한성부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현재 서울시 중구 정동)에 묻힘(능호: 정릉貞陵).

124

양주군(楊州郡)(양주)()로 만들었다.

(태조실록6(1397)124)

54

임금이 흥천사(興天社)에 거둥하여 마침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새로 건축한 청사(廳舍)에 가서 이를 시찰하였다.

태조 7(1398)5

5월 흥천사 사리전 기공

6월 완공.

태조 7(1398)826

1차 왕자의 난(세자, 정도전, 남은 등 살해 당함),

826

영안군 이방과(李芳果)를 세자(정종)로 책봉.

95

국왕(태조)이 세자(영안군 이방과,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줌(정종 즉위)

정종 즉위(1398)95

국왕(정종)이 부왕(태조)의 존호를 상왕으로 올림

정종 즉위(1398)117

국왕(정종)이 유씨(柳氏)를 후궁(後宮)에 맞아들여 책봉하여 가의 옹주(嘉懿翁主)로 삼고, 그 아들 불로(佛奴)을 일컬어 원자(元子)라 하였다. 이 불로가 정종 즉위 이전에 낳은 정종의 친자인지 여부를 놓고 또 원자 칭호 부여로 인하여 물의가 일어났기에 궁궐 밖으로 내보냄 당하였다. 이후 이 원자 관련 기사는태종실록10(1410)122; 태종실록16(1416)78

정종 1(1399)21

국왕이 태상전(太上殿: 태조)에 조회하고제릉에행차함을 고하고, 유후사(留後司, 개경)로 출발하였다. 15일 개경 도착, 19일 제릉 제사, 24일 한양 귀경.

215

국왕이 유후사(留後司)에 이르러, 수창궁(壽昌宮)에 나아가서 북원(北苑)에 올라가 좌우 근신들에게 송경(松京)으로 도읍을 옮기려함을 "고려 태조의 지혜로서 여기에 도읍을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라고 표현하였다.

226

서운관(書雲觀)에서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라고 상언을 하자 국왕이 종척(宗戚)과 공신들과 상의하여 도읍을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였다.

37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니, 공후(公侯)는 모두 따르고, 각사(各司)에서는 반씩만 따랐다. 상왕(태조)는 한성을 출발하며 정릉을 지날 때 머뭇거리며 한성을 수도로 정한 것은 오로지 내 뜻만이 아니었고, 나라 사람과 의논한 것이었다." 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갔다

39

상왕(태조)37일 한성을 출발하여 39일 상왕(태조) 개경으로 환도하여 변안렬(邊安烈)의 옛집에 나아갔다. 13일에 새벽 밝기 전에 시중(侍中) 윤환(尹桓)의 옛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313

국왕(정종) 개경으로 환도하여 수창궁으로 입궁하다.

627

국왕이 송도(松都)에 종묘(宗廟)를 영건(營建)하여 한양 종묘신주를 이안하여 친히 제사 지내고 싶다고 좌우에 말하였다. 이에 참찬문하(參贊門下) 이거이(李居易)가 태상왕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실이 모두 그곳에 있으니 종묘를 새로 짓고 신주를 옮기는 것은 태상왕을 계술(繼述)하는 것이 아니니 향후는 대신을 보내 제례를 섭행(攝行)하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자 옳다고 말하였다. 즉 개경으로 완전한 천도를 하고 싶었으나 반대 의견을 들은 것이다.

716

도읍(都邑)이 정해지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공후(公侯)를 보내어 상왕전에 나아가 왕명(王命)을 품달(稟達)하게 하였다.

88

국왕이 하늘의 변고와 땅의 재변이 있다는 이유로 대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810

국왕이 서운관의 "마땅히 정전(正殿)을 피하고,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삼가서 변괴를 없애야 합니다." 라는 건의를 받아들여 수창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재액을 피하려는 의사를 밝히다.

94

여우가 수창궁(壽昌宮) 성 안에서 울었다.

117

부엉이가 이어소(移御所)에서 울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수창궁에서 개경 안 다른 곳으로 국왕이 옮겨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1일 수창궁으로 환궁)

121

수창궁(壽昌宮)에 환어(還御)하였다.

정종 2(1400)128

임금이 즉위(卽位)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곧 마땅히 정안공(靖安公)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었었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128

(2)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21

국왕(정종)이 아우 정안군 이방원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게 한다고 말하였다. 즉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 등이 국왕에게 개국에 공로가 큰 정안군(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라고 주청을 하자 국왕(정종)이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며 이번의 변란(왕자의 난)은 정히 나라의 근본(후계자)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무자(無子)하고 또 옛날 성왕(聖王)이 비록 적사(嫡嗣)가 있더라도 또한 어진이를 택하여[擇賢] 전위하였기에 이를 따라 여러 아우 중에 개국 초()에 큰 공로가 있었고, 또 정사(定社: 왕자의 난)하던 즈음에도 공이 큰 정안군을 세자를 삼고, 또 내외(內外)의 여러 군사(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한다는 교지를 전하였다. 이에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이 명령을 듣고, 서사(庶司)를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22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이서(李舒)를 보내어 종묘(宗廟)에 세자(世子)를 책봉하는 것을 고하였다

24

국왕(정종)이 정안군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세자로 책립하고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도 맡게 하였다.

46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사병을 혁파하라는 상소를 하자 국왕과 세자(후에 다음 국왕. 즉 태종)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저(李佇)가 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61

태상궁(太上宮)의 호()를 세워 덕수궁(德壽宮)’이라 하고, ()승녕부(承寧府)’라 하였다.

*태상궁: 140061일 당시는 상왕이므로 상왕궁인데 정종실록을 만들 당시(세종 6, 142431일 완성) 태상궁으로 기록한 것임.

620

국왕(정종)이 상왕(태조)의 존호를 태상왕으로 올림

72

세자(후에 태종)가 덕수궁(德壽宮)에 조알(朝謁)하였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72

국왕이 세자(후에 태종)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德壽宮)에 조알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였다.

84

편문(便門)으로 나와서 본궁(本宮)에 이르러 역사를 감독하였다. 이 기록은 국왕이 향후 세자에게 양위하고 그 이후 이 본궁에서 거주할 사전 준비로 볼 수 있다.

91

북문(北門)으로 나가서 몰래 본궁(本宮)에 거둥하여 영선(營繕)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1113

국왕(정종)이 세자(정안군 이방원,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줌(태종太宗 즉위).

태종 즉위(1400)1113

(신왕이)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을 삼고, ()를 세워 공안부(恭安府)’라 하고, 중궁(中宮)의 부()인녕부(仁寧府)’라 하였다.

*이 주상은 정종이다.

*즉 신왕(태종)이 주상(정종)의 존호를 상왕으로 올림.

1222

수창궁(壽昌宮)이 화재를 당하였다.

1222

참위(讖緯) 술수(術數)에 따라 새 수도를 정하여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는 것을 이유로 국왕이 대신들에게 서운관(書雲觀)의 비밀 도적(祕密圖籍)을 상고하여 천도(遷都)의 이해를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분운(紛紜)하여 정해지지 못하였고 우정승 하륜(河崙)"마땅히 무악(毋岳)에 도읍하여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특히 대부분 새 수도 논의를 반대함을 갈파한 국왕은 "신도(新都)는 부왕께서 창건하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따로 도읍을 세워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는가?"라는 이유를 앞세워 관련 토론을 정리하고 서운관에는 술수(術數지리(地利)에 관한 서적을 감추도록 명령하였다.

태종 1(1401)년 윤31일 출발428일 직후 개경으로 환도

31일 태상왕(태조)이 대장 불사(大藏佛事)를 흥천사(興天寺)에 베풀고자 신도 즉 한양으로 출발, 311일 태상왕(태조)이 한성 흥천사에서, 함경도를 향하여 출발, 안변 석왕사 등을 순행하였다.

태종 1(1401)년 윤311

공신(功臣)에게 청화정(淸和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처음에 임금이 정전(正殿)이 협착하다고 하여, 고쳐 지어 넓히고, 궁 북쪽에다 정자를 짓고, 하륜(河崙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청화(淸和요산(樂山무일(無逸)을 써서 올렸다. 임금이 무일로 정전의 이름을 정하고, 청화로 정자의 이름을 정하였다.

612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인장을 받음

*이 인장은 명나라 2대 황제인 건문제가 3대 황제인 영락제에 의하여 축출당하기 이전에 하사한 것이다. 따라서 영락제 요청에 의하여 태종 3(1403)48일 조선에 온 사신을 통하여 명나라에 반환하였다. 국왕(태종)은 영락제가 하사한 조선국왕지인이라 새긴 새 인장을 140348일에 중국 사신으로부터 받았다.

719

국왕이 개경 추동에 있는 시좌궁(時坐宮) 궁실(宮室)을 고쳐 지을 것을 명령하였다.

*시좌궁: 그 당시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

*추동의 시좌궁: 태종의 개경 잠저이며, 즉위 후 본궁으로 승격되었다.

723

시좌궁 궁실의 공사를 정지하라고 주청한 사간원(司諫院)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사수(尹思修)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다시 직사(職事)에 나아가게 하였다.

태종 2(1402)15

 

국왕이 의정부에 명하여 개경(당시 왕이 거처한 수도이자, 궁궐이 있는 곳)에 종묘를 세우는 것이 타당한지 질문을 하고 논의를 하게 함. 이에 의정부에서 이미 한양에 있으므로 또 세우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결론을 내려 이를 받아 들임.

711

국왕이 여러 대신이나 각사(各司)에 새 도읍을 정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신도(新都)로 돌아갈 것의 가부(可否)를 포함하여 구도(舊都)에 있어야 된다, 혹은 도읍을 무악(毋岳)으로 옮겨야 된다고 말하는 의논이 분운(紛紜)하였다. 해가 반나절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하며 파하였다

태종 3(1403)223

삼부(三府)에서, 추동(楸洞)의 궁기(宮基)가 협소하고 비습(卑濕)한데 국왕이 영선(營繕)하는 것을 그치지 않자, 또 상왕이 거처할 덕수궁을 영선하자 먼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세울 땅을 택하자고 의견을 내고 이어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건덕전(乾德殿) 옛터에 짓기를 의논하니 이에 국왕이 윤허하였다.

38

(완공한) 덕수궁(德壽宮)으로 태상왕(太上王)이 이어(移御)하였다.

48

이날 도착한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인장을 받음

태종 4(1404)710

국왕이 의정부에 명하여 종친의 제군(諸君)과 삼부(三府)의 기로(耆老)를 모아 도읍(都邑)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국왕이 의정부 사인(舍人)을 불러 "지난 번(상왕 때)에 송경(松京)으로 이어(移御)한 것은 길이 천사(遷徙)한 것이 아니고, 피방(避方)한 것이고 .종묘 사직을 개경으로 이안(移安)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종실의 제군(諸君)과 삼부의 기로(耆老)가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한경(漢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과 송경(松京)에 종묘를 이안(移安)하는 것 두 가지를 가지고 그 가부를 물으니, 여러 대신이 모두 종묘를 이안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좌정승 조준(趙浚)은 주나라 양경제도(兩京制度)를 본때 한경(漢京) 송경(松京)의 양경(兩京) 제도를 본받자고 아뢰었다. 이에 국왕은 의정부에 " 한경은 태조가 창건한 땅이고, 또 종묘가 있는 곳이니, 혹은 가기도 하고 혹은 오기도 하여, 양도(兩都)를 폐지함이 없도록 하라. 이제부터는 다시 의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교하였다.

86

원자 이제(李禔)를 세자로 책봉

91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궁실을 수즙(修葺)하기 위하여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축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로 한경(漢京)의 이궁 조성 도감제조(離宮造成都監提調)를 삼음. 이 날 이전에 국왕이 명년 겨울 즉 1404년 겨울 무렵에 한양으로 천도하겠다는 계획과 한양 천도하는 이유 등을 밝혔음.

99

한경(漢京)에 이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상지(相地)하도록 명하고, 유한우(劉旱雨윤신달(尹莘達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상지(相地)하였다.

913

신도(新都)의 이궁 조성 도감(離宮造成都監)을 고쳐 궁궐 수보 도감(宮闕修補都監)으로 하다.

919

진산부원군 하륜이 한성(漢城)의 무악을 다시 수도로 건의하였다.

926

국왕이 한양(漢陽)의 무악(毋嶽)에 거둥하여 도읍(都邑)을 정할 땅을 상지(相地)하니, 하륜(河崙조준(趙浚남재(南在권근(權近)과 대간(臺諫)이 각각 1()씩 호종(扈從).

102

국왕이 도읍을 정할 땅을 상지(相地)하기 위하여 한성(漢城)의 무악(毋岳)을 향하여 거둥하였다. 조준(趙浚하륜(河崙권근(權近) 및 이천우(李天祐) 등 여러 종친(宗親)이 호종(扈從)하였다

104

국왕이 무악에 도착하여 천도 장소로 무악이 적합한 곳인데 천도 장소로 결정되지 못한 아쉬움을 밝히고 (하지만) 이미 이전에 태상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이룩한 한양을 버리고 새 역사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한양과 무악의 풍수지리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수행한 사람들과 질의 응답을 하였다.

106

한양(漢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에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이 날 도읍은 종묘에 들어가 척전(擲錢)을 통하여 결정되었다. 신도(新都) 즉 한양은 2() 1()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 1()이었다. 이에 국왕은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를 상지(相地)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아쉬움 담은 말을 하였다.

태종 4(1404)108

국왕이 환경(還京)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