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9일/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연방죽골 건밭등에서 백제 저온 창고(석빙고와 유사한 시설) 발견 소식을 듣고
금마의 산천 역사 모시는 인걸들에게 드림
금마는 이천년전 첫 이름 금마라네
지금껏 그 이름을 부르고 아끼나니
이같이 지조지키는 고을 어디 있더냐
기준왕 남천하여 금마를 도읍하며
마한을 세우시고 기준성 쌓으셨네
대대로 익산의 역사 첫머리에 전하네
백제의 무왕님은 금마의 연방죽골
태묻고 살으시다 나랏님 되시었지
왕궁터 미륵사터와 쌍릉함께 남기셨네
고구려 유민들은 고안승 왕을 세워
나라를 찾으려다 신라에 속았구나
금마로 유인당하여 보덕국도 뺐겼네
하느님 선물이라 나라의 으뜸 곡창
근면과 정성이면 대대로 풍족하리
금마의 이름지키며 신선마냥 살자스라
2024년 1월 20일
금마면 오금산과 연방죽
백제의 무왕님은 오금산 마를 캐고
산남쪽 용추(龍湫)에서 후손들 빨래하고
나는야 연방죽에서 꽃향기에 취했지.
2024년 2월 17일
*물이 땅속에서 펑펑 솟구쳐 올라오는 작은 연못 일대는 용추龍湫인데 속칭 용초라고도 불렸다.
*이 연방죽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익산군> 산천(山川)마룡지(馬龍池)로 볼 수 있다.이를 소개하면<마룡지(馬龍池)오금사(五金寺)남쪽 백여 보(步)되는 자리에 있다.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한다.>.그런데 이 내용이『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년」<익산군>에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금마지金馬志(1755년)』와『익산군지(1959)』에는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금마지金馬志(1755년)』와『익산군지(1959)』안 사찰(寺刹) 오금사(五金寺)에도 관련되는 아래 내용이 실려 있다. <오금사 보덕성 남쪽에 있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어머니를 위하여 마를 캐다가 문득 다섯 덩어리의 금을 얻었다. 뒤에 왕이 되어 그 땅에 나아가 절을 짓고 인하여 오금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용화산 미륵산 이름
백제의 무왕부부 용화산 납시어서
미륵사 짓고나자 미륵산 이름 생겨
언저리 마을 이름들 용자 들어 갔더라
금마면 신용 용순 왕궁면 용화 용남
용화산 미륵산과 얽어진 불교 이름
서럽다 본래 이름은 어느 곳에 묻혔나
2024년 2월 17일
연방죽과 더불어
봄에는 물속에서 연잎이 올라오고,
여름에 연꽃 춤과 향기로 황홀하니
오금산 신선이 되어 느릿느릿 걸었지
초가을 연밥 따며 웃음꽃 이어지고
늦가을 물을 빼면 우렁 붕어 살쪄있네
연잎과 뱜줄은 거둬 노적눌을 만들지
겨울에 꽝꽝 얼어 친구가 되어 주니
찬바람 몰아쳐도 몸 마음 달려간 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리움은 커가지.
2024년 2월 23일(*할머니댁은 연잎과 뱜줄을 땔감으로 쓰려고 눌(노적)을 만들었다)
우리 할머니댁 그리운 나무 들 그 중 마지막 나무 감나무
망국의 아픔을 안고 가난에 허덕이던
강산의 나그네 우리 할아버지(1896년생, 유릉 참봉)
(1927년) 마지막 터전은 마한 땅 금마 연방죽골입니다.
오시자 서둘러 감나무 등 여러 나무 심으시고
오로지 이들만을 친구로 삼으시니
연씨, 사씨, 반씨, 홍씨, 봉씨, 배씨인데
흥에 겨우면 公을 붙이셨다하오.
나그네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 떠나가시자
이들 각성 바지들도
절로 날로 야위고 무너지니
그 중 감씨 가문은
남은 것 대문 옆에 겨우 한 포기니
감씨 가문 마지막 어르신이시네.
그 어른 내게 이르더라
주인 집 헐려 팔려 어느 교회로 환생하였고
주인 님이 바라보던 돌 친구들(바우씨, 巖氏, 석씨, 怪石) 우물 속에 갇혔으며
보기에도 아까운 돌담과 해마다 잘도 다듬어진 탱자울은 전설이 되었으며
나 홀로 빈 터를 지키니 절로 수문장 신세라고
그 어른은
그리움과 외로움 속에
감도 겨우 몇 개만 달리더니
그마져 흔적도 사라진 지 오래라
물기 많고 달디 단 그 감은
씨는 한 두 개 뿐이고 그마져 입에서 녹아내려
사시 감나무라 불렸네.
그대는 나 같이 史學을 찾아가는 史氏였구려.
안타까운 것은
왜 접이라도 붙여 이어지게 하지 않았나
자책합니다
2017년 10월 28일


손 가락 모습 표시가 있는 곳 언저리에 마한 유민의 옛 선산과 경작하던 논 밭이 있었다. 이 일대를 건밭뜽으로 불렀다. 또는 방죽안이라고도 불렸다. 마한 유민의 옛 선산은 방죽안 선산, 겉밭등 선산이라 불렀다. 서남쪽에 자리한 할머니댁에서 약 250미터 거리이다. 조선 고종 때 오대조부께서 약 3천평을 마련해주신 것인데 일제 강점기 초 무렵 어느 일가분(당시 마한 유민의 조부님은 서울에 사심)은 금마에 사시던 강씨 가문에게 매도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경에 마한 유민의 부친이 일본에서 고학을 하며 버신 돈으로 일부를 구입하였다. (당시 강씨 가문이 조씨 가문에 중요한 곳이므로 거듭 권하여 요청하셨다 하며 이로 인하여 구입을 한 것이다. 산소는 고조부의 아우님 내외분, 증조부모 형제 내외분, 조부(1896-1964년), 숙부 3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익 산 왕궁리 유적 / 발굴 결과 네모진 궁성임이 밝혀 졌다. 필자는 이 네모진 궁성으로 인하여 이 일대를 예로부터 모질메(네모진 산)라고 불렸다고 추정한 바 있다. < 마한 유민 2022 년 5월 26일 익산 왕궁리 유적의 모질메 지명에 대하여 > 이 궁성 유적이 확인 되기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마한 유민의 조부께서 12마지기 밭을 소유하셨으며 이후 마한 유민의 아버지께서 물려받아 소유한 바 있다. 이 땅은 엽동 마을에 1960년 7월 이사 오신 뒤인 1964년경 매각하셨다. 이 밭 12마지기의 위치는 파란색 표시가 있는 곳(서쪽 중간쯤)이며 이 언저리에서는 백제시대 화장실 유적과 공방 터가 발굴되어 이 유적과 발굴 유물은 학계에 큰 주목을 받고 있다.



ㅆ
























작은댁에서 모시고 있는 옛 선산에서 옮겨 모신 산소들(익산시 덕기동 154-5, 산 20-1) 먼 뒷산 미륵산(좌) 용화산(우) 그 앞에는 오금산(좌)과 금마산(우)이다. 이 산소의 산줄기는 미륵산 오금산 연동을 경우한 이어진 산줄기이다. 이곳에서는 왕궁리오층석탑이 동남쪽 1100미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매우 잘 보이다. 산소 뒷쪽 바로 뒷산 북쪽에 옛 집터(416미터 거리)가 있다.. 옛 선산에서 1976년경 금마면 서고도리 452번지에 약 5여 년간 계시다가 1978년 한식날 익산시 덕기동 산 20-1번지로 그후 얼마 안가 (약 5년 뒤) 현재의 자리로 모시게 되었다.





나(마한 유민)는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연방죽골·방죽골) 마을 저수지(연방죽) 일대를 언제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태어난 마을보다 도 더 가깝게.
청년이 될때까지 연방죽골 마을에 자리한 할머니(1905-1986년)댁, 연방죽, 연방죽의 동북쪽에 자리한 건밭등(건밭동, 검밭똥)으로 불리던 곳의 선산(산과 밭, 서고도리 373번지·374번지 일대)은 정과 추억, 고난이 응어리진 곳이다.
*할아버지(1896-1964년)께서 내가 어린 나이 때에 별세하신 관계로, 아버지께서 장남이지만 집안 사정으로 따로 살고 있던 관계로 할아버지댁을 가는 것이 아닌 할머니댁을 가는 것이 된 결과 택호가 할아버지댁이 아닌 할머니댁이 된 것이다. 약 5백여평이되는 넓은 곳이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들이 돼지를 잡아 놓고 미쳐 먹지 못하고 도주했다고 하신다.
*건밭은 기름진 밭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건밭등은 건밭이 있는 산등성이 로 볼 수 있다. 필자 추정이다
*1978년 헐려 사라진 할머니댁에서 연방죽과 연방죽 건너 건밭등 선산 모두 너무나 잘 보였다. 연방죽은 동북 방향으로 약 50m 거리(울타리에서 최단 거리는 30m)이다. 건밭등은 같은 방향으로 약 250m 거리(울타리에서 최단 거리는 230m)이다. 헐린 안채 건물은 어느 교회에 팔려 이건되었는 데 그 장소를 알 수 없다. *건밭등 밭과 최근 발굴하여 추정 서동생가터(추정 백제 무왕 생가터)로 정한 곳(금마면 서고도리 377-5번지)은 약 150m 거리이다. 할머니댁에서 추정 서동생가터는 동서방향으로 약 220m 거리(울타리에서 최단 거리는 215m)이다.
할머니댁에서는 물론이고 그 바로 옆 산 그리고 연방죽에서 미륵산 용화산 오금산 시대산 봉실산까지 모두 잘 보인다. 그 중 오금산 전경(보덕성 포함)은 그 어느 곳보다도 가장 잘 보인다.
*아버지(1924-1997년)께서는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아 우리나라의 상세한 역사를 잘 모르실터인데 보덕성 이름을 아시므로 나는 신기하게 여겼었다.
* 나중에 알았는데 조선시대는 물론 아버지 세대까지는 익산 금마지방에서는 익산 토성이니 익산 오금산성이니 하는 명칭은 전혀 모르시고 그저 보덕성으로만 널리 알고 계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버지 형제분들의 자 이름에 모두 ‘덕(德)’ 자까지도 넣으셨던 것이다.
이 옛 선산 영역은 추정 서동생가터를 공원으로 만들기에 앞서 일대를 사전 발굴하는 과정에서 건밭등이 포함되므로 발굴하였는 데 지난 2022년 초에 백제시대 저온 창고 유적이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이 백제시대 저온 창고는 규모가 비슷한 2기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데 길이가 4.9m(1호)~5.3m(2호), 너비가 2.4m(1호)~2.5m(2호)이다.그 바로 북쪽에서는 25평(길이 9.47m×너비 8.57m) 규모의 백제시대 건물터도 나왔다. 이 발굴 소식을 필자는 2023년 겨울경에야 알게 되었다. 이에 감격하여 위 시조를 지었는데 고칠 곳이 많다.(20240120)
*위 2024년 1월 20일 지은 시 안에는 오금산이 들어가지 않아 못내 서운하였기로 뒤의 시를 지었다.
*용화산 미륵산 이름이란 제목의 시는 용화산 미륵산 이름 이전의 본래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서운하고 궁금도하여 지었다.(24240217)
그런데 이 백제시대 저온 창고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에 필자는 군대(1983년 12월 10일-1986년 3월 20일) 휴가 나왔을 때인 1986년 1월에 종증조(공릉참봉, 증조할아버지의 형님되시는 분. 아들을 두시지 못하고 따님 한 분만 장성하셨다. 정미 의병 활동을 하시고 요절하심. 호 녹야당) 내외분 성묘를 하기 위하여 건밭등 선산으로 걸어 가던 중 밭 가운데(서고도리 374-1)에서 오래된 석곽을 발견하였다. 수확 철이 지난 겨울이라 작물의 밑둥지만 남았기로 석곽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큰 네모진 석곽인데 뚜껑은 없는 상태였다. 이에 마한 백제 연구로 익히 알려진 고교 선배(당시 일면식도 없었지만)인 최완규씨(당시 원광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현재 원광대학교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연방죽 아래에서 만나 현장에 갔다. 그런데 이 때 석곽은 밭 가운데에서 밭두덕 옆으로 이동된 상태였다. 그날 최완규씨는 곧 바로 백제 때 만든 석곽으로 판정을 하였다. 이로 보면 이 언저리에서 백제 유적의 첫 발견은 마한 유민임이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익산 연방죽골 이외에도 백제 역사 유적과 우연하게도 몇 인연이 있다.
하나는 익산 웅포 입점리 백제 고분이다. 입점리는 나의 5(오)대조부(1807-1891년)께서 1829년부터 1864년까지 35여 년간 은거지였다. 이로 인하여 오대조부님의 제 3남(나의 고조부의 동생)과 그 자손의 묘소가 입점리 백제 고분 바로 위에 있었고 (최근 화장을 모심) 직계 후손이 그 인근에 최근까지 거주하였다.



둘은 익산 왕궁리오층석탑이 있는 백제 왕궁터 안 백제 화장실과 공방터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12마지기 밭이 할아버지의 소유였다가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아버지의 소유였고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이하 여섯 사진도 동일) *관련 필자 논문은 마한 유민 티스초리블로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목: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연구






익산 왕궁리 유적의 백제 궁담(남서쪽 모퉁이) 사적 제408호,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 발굴 결과 동서 230m, 남북 450m. 이 안에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다. ‘모질메 산성’이라는 문화재안내문은 사진 안에서 나무가 밀집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최근까지 밭과 논으로 경작되던 지대이다. 사진 안 작은 건물과 그 주변에 백제 화장실과 공방이 있었는데 1964년까지 필자 아버지 소유로 2400평이 있던 자리이다. 2025년 5월 25일 조원교 촬영
셋은 익산 미륵사지 인근 마을인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마전(삼바지) 마을은 나의 외가가 있어 어릴 때 추억이 깃든 곳이고 미륵탑은 오며 가며 구경하던 곳이고
.
우연일까 아니면 지령과 신령에 이끌림일까 나의 지난날 학사 석사 박사 논문 제목에 모두 백제가 있다.
학사 논문은 「일본 아스카시대에 백제인의 역할」(1987년 2월 중앙대학교 사학과)
석사 논문은 「백제 불상광배에 관한 연구」(1990년 8월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논문은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연구」(2016년 8월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학과)
또한 익산에 관련된 논문 2편이 있다..
「익산益山 연동리蓮洞里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광배光背의 도상 연구圖像硏究」, 미술자료 제 49호(1992년 6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 사리장엄구에 대한 연구」, 百濟硏究 49輯(2009년 2월)
지금도 미륵산 용화산 오금산을 바라보고 또 연방죽을 옆에 두고 방죽길을 걸어 선산에 성묘가던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긴 행렬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억을 한다. 누구라도 부러워했을 행렬, 행복을 느꼈던 그날들이 늘 그립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고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던 분들이었지만 자존심을 지니고 의로움을 가치 덕목으로 여기며 살으신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늘 경모하며 길이길이 정신을 따르고 산소만이라도 잘 모시며 살고자 한다.
금마면 서고도리 373번지·374번지 일대인 건밭등 선산과 딸린 밭을 장만하신 역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암송할 정도였다. 길이 전하여야 하기로 눈물을 머금으며 가난의 세월을 이겨내심을 감사히 여기며 아래 기록을 더 남긴다.(이하 대부분 비공개로 생략하였다.)
우리 집안에서 이 연방죽골 마을로 처음 오신 분은 나의 할아버지(1896-1964년)이다. 서울 명동에서 태어나 국치 이후 각지를 전전하시다가 충청도 연산에서 나의 아버지(1924-1997년)를 낳으시고 이어 금마 읍내 저전 마을을 거쳐 1926년 연방죽골에서도 건밭등 윗쪽인 용못골로 이사를 오셨다. 용못골에서는 큰 고모(1926-2007년)를 낳으셨다. 그런데 용못골은 경치는 좋지만 너무 외진 곳, 특히 조상 묘소가 가깝지만 잘 안보이고 또 조상 묘소가 아래쪽에 계셔서 송구, 불편하시자 1927년 연방죽골 연방죽 서남쪽으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당시 건밭동 선산에는 할아버지의 작은할아버지(1833년생-조졸早卒) 내외분 산소, 할아버지의 큰아버지(1910년 9월 9일 순절, 공릉참봉 역임) 내외분 묘소, 할아버지의 아버지(1863-1912년 자절, 적사嫡嗣, 돈녕부 도정) 묘소가 있었다. 즉 당신의 아버지 묘소가 들어선지 약 14년 뒤 이사오신 것이다.
*익산 함열과의 인연은 칠대조부(1754-1837년)께서 함열현감을 지내시며<재임 기간: 정조 10, 1786년 6월-정조 12, 1788년 6월 체귀遞歸> 약간의 전답을 함열 입점리에 마련한 데서 시작되었다. 또 오대조부(1807-1891년)께서 함열 입점리에 낙향하여 35여 년간 은거하신 바다. 또 오대조모님 여흥민씨께서는 함열에서 별세하신 바 처음에 함열에 묘소가 계시다가 나중에 금마 미륵산 독점으로 이장을 모셨다
*오대조부께서 함열 입점리에 은거하실 때 익산 금마를 왕래하셨다고 하신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륵탑과 왕궁탑은 유명한 고적으로 탐승하던 곳이기에 여가에 찾으셨을 것이고 특히 친인척 몇 분이 당시 함열 현감이나 익산 군수로 근무하였기로 함열 금마 일대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예 조진상趙鎭常공::오대조의 11촌 숙부, 괴산공파 내 충주공(휘 태과) 曾孫 嗣孫인 조경규(趙景逵)의 계자, 익산군수 재임 1839년 6월-1842년 12월, 홍기섭洪耆燮 공:: 오대조모의 외숙, 함열현감 재임 1829년 6월-1831년 6월, 함열 현감 재임 시 함열 내아內衙에서 태어난 손녀는 헌종의 계비(명헌태후, 효정왕후,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홍씨)이다.> 그 때 익산 금마에 대한 특별한 사실 즉 익산이 마한의 고도이며 기준왕의 남천지(기준왕의 익산 남천은 동몽선습 등에도 나옴) 그리고 익산 고을의 주산(主山)인 용화산(龍華山) 약칭(略稱)인 화산(華山)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셨다고 한다. 기준왕은 절의를 지킨 성인 기자이 후손이다. 따라서 금마는 예로부터 성인(聖人) 기자의 높은 절의를 따르고 선진 문명인 화하(華夏) 문명을 계승한 매우 높은 의미를 지닌 특별한 지역으로 자긍심을 지니고 또 대우를 받는 고을인데 오대조부님도 역시 이를 주목하셨을 것이다. 용화산(龍華山) 약칭(略稱)인 화산(華山)은 선조 문강공(文剛公: 필자의 20대조 조말생; 1370-1447년)의 아호와 같다. 이 여러 가지를 감안하신 오대조부님은 금마를 좋고 중요하게 여기시고 후손들에게 한양(서울)에 이어 익산을 고향으로 삼게 만드신 것이라 전한다..*우리 가문과 금마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오대조부께서 금구 현령을 지내시며<재임 기간:고종 8, 1871년 6월-고종 9, 1872년 11월> 약간의 토지 (일부 임야 포함 열다섯마지기, 총 삼천평)를 마련하신 데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하여 먼저 고조부(1829-1866년)의 5형제 중 두 동생 내외분이 금마에 사시게 된 것이다. 기타 많은 인연이 겹쳐 있다.
*고조부의 바로 밑 동생(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은 막내 숙부(1805-1868년)에게 출계하여 함열 입점리에 그대로 사셨다. 이로 인하여 그 자손은 웅포면에 최근까지 거주하였다.
*미륵산은 묘소 자리로는 매우 좋은 길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궁벽진 곳이므로 농사지을 토지는 연방죽골 검밭동에 마련하신 것이라고 들었다. 미륵산에는 삼봉 앞산에 고조부님 둘째 동생 내외분 묘소, 미륵산 독점에는 나의 오대조모와 고조모 묘소가 있었다. 미륵산과의 이 인연은 우리 가문의 따님과 혼인한 저명한 내외분의 사후 신후지지로 이어졌다. 이는 1979년 파묘되었다.
*고조부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보광사 입구 앞산에 있었다(조상님들이 경기도 장단에도 거주하였기로 장단 분들과 혼인들을 하셨고 장단 포함 인근에 묘소도 전한다) . 나의 증조부님께서 함열 박전리 뒷산으로 이장을 모셨다. 이를 1997년 3월 청명일에 내가 병석에 계신 아버지 (1924-1997년) 를 대신하여 주관하고 두 숙부와 함께 미륵산 독점에 있던 고조모님(1827-1864년) 묘소로 모셔와 합장으로 모셨다. 이후 두 내외분은 다시 연천 선곡리 선산으로 이장을 모셨다.
*건밭등 선산과 밭을 일제 강점기 초에 어느 일가분이 금마사시는 강씨 가문 분에게 매각하였고 묘소들만 남아 있었다. 당시 우리 직계는 금마에 살지 않으셔서 또 적사(嫡嗣)였지만 너무 어린 가장이었기로 매각을 알았을 지라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말 1940년에 이르러 금마 강씨 가문 분이 나의 조부댁에 와 조씨 가문에게 특별한 곳이므로 다시 사가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자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일제 치하에 배급을 타 연명하는 혹독한 가난을 겪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입을 결심하셨다. 나의 아버지에게 송금받아 일부나마 구입을 한 것이다.
*아버지(1924-1997년)께서는 16세인 1939년에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 대판(大阪, 오사카)에서 대판공업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아버지는 친족인 조원복씨(趙源復; 1917-2005년, 충정공 조병세趙秉世의 현손이자 종손宗孫, 조중목 공의 장손), 조재호씨(완주군 비봉면 거주), 박흥복(경기도 양주 거주)와 같은 학교를 다녔는 데 조원복씨는 귀국하여 성공을 하여 고려피혁회사를 창업하였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평생을 집안을 다시 일으킨다는 사명감으로 사셨다. 일본 대판에서는 주간에 근로하여 상당히 돈을 버셨다고 하며 그 돈 대부분은 송금을 하여 어려운 가세에 큰 도움이 되었고 또 1940년 옛 선산과 토지 일부를 조부 이름으로 재구입하게 하였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1940년 토지 재구입한 일과 관련하여 금마 사시는 강씨 가문의 은덕을 크게 입었다고 고마우신 댁이라고 자주 말씀하였음도 밝힌다.
*그런데 이렇게 되찾은 토지를 1976년경 아버지와 상의없이 매각하였다. 유산 지분(몫)이라는 주장을 하며 매각하고 묘소들<고조부의 셋째 동생 내외분 묘소 2기, 증조부 큰형 내외분 묘소 2기, 증조부(1863-1912년, 적사嫡嗣, 돈녕부 도정) 묘소, 숙부 세 분 묘소 3기>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을 모시거나 화장을 모셨다.
*증조부의 형님(공릉참봉) 내외분 묘소 2기가 있던 곳 약 50여 평은 계약 문서에서 빼고 팔았었다. 그 후 약10여 년 뒤인 1989년경 이장을 모시게 되었는 데 매우 크고 두꺼운 훌륭한 목곽이 나와서 참관한 마을 분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구차한 처지만 알았는데 뜻밖의 보기 드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어머니(1877-1959년)에게 지극한 효자였다. 늘 무릎을 꿇고 조심조심 행동거지 의절을 갖추신 분이라고 나의 어머니(1926-2020년)께서 늘 말씀하였다. 이 마음으로 날마다 연방죽에서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조상님의 산소에 인사를 드린 것이라고 본다.
우리 집안과 땔래야 땔수 없는 연방죽에 슬픈 이야기가 있다. 숙부(1936-1964년)가 신혼 초에 신방에서 불이 나 화상을 극심하게 입자 비관하여 밤 중에 아무도 모르게 연방죽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새벽에 발견) 이로 인하여 숙모 진주소씨는 탈지奪志 즉 강제로 수절을 못하게 하였다. 혼인신고도 안하였지만 수절하겠다고 버텼고 친정에서도 몇 년을 버텼지만.내가 7살 무렵에 둘째 누나에 이끌려 숙모의 친정댁에 숙모를 보러 갔었고, 20살이던 1980년에는 인천 부평 계산동에 역시 둘째 누나와 함께 숙모를 보러 간 바 있다.
당시 화재로 귀중한 목숨과 더불어 집안의 귀중한 자료들도 많이 소실되었다. 그 중에는 할아버지께서 가문 몇 대에 걸친 집안의 역사를 한시로 지은 작품들도 있었다.
슬픈 일이 또 있었으니 숙부(1929-1951년, 아버지의 바로 밑 남동생)가 한국전쟁이 나자 마을 친구 둘(국중화, 주남중)과 함께 자진 참전하여 강릉에서 전사하신 것이다. 살아 돌아온 마을 친구들은 '조아무개는 앞장서 가다가 총을 맞았다'고 증언하였으니 충의 정신을 간직한 자랑스러운 연방죽 조씨 가문 사람으로 길이 길이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인하여 숙모 삼척진씨도 탈지奪志. <이상은 2024년 1월 19일 작성>
<나의 할아버지(1896-1964년)의 호는 화암(華菴)이시고 그 외에 의암(義菴), 연재(蓮齋) 연제(蓮堤)도 있다. 1924년 충청도 연산에서 나의 아버지(1924-1997년)를 낳으시고, 1926년 금마 연방죽골 안 용못골(서고도리 500번지 부근)로 이사오셨다. 그러나 선산(서고도리 374번지 일대)이 바로 지척간인데 잘 보이지 않고 더구나 더 높은 곳이기에 송구함으로 날로 괴로워지시다, 이듬해 1927년 남쪽 약 400미터 거리인 곳<연방죽골, 서고도리 448 449 446번지 등, 449번지는 이후 도로 확장으로 거의 없어짐. 금마면 서고도리 444-9, 444-11, 444-4번지는 집터의 텃논이었고, 452-18, 453-41, 450-4, 450-3번지(도로에 들어간 곳 포함)는 집터의 주변 밭이었다.>으로 이사와 사셨으니 이곳에서 연방죽(서고도리 493번지) 바로 30미터도 안되는 곳이다. 이 때부터 호를 연재(연齋) 연제(연방죽)라 하신 것이다.
이 집터에서는 연방죽을 물론 250미터 거리인 연방죽골 선산이 모두 다 아주 잘 보인다.(이 선산에선 최근 백제 저온 창고 시설이 발견되었다.) 또 이 집터 동쪽에 자리한 추정 서동생가터(서고도리 377)는 약 200미터 거리이다.
광복이 되자 전 경기도관찰사 조중목 공께서 금마 할아버지댁에 오셔서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義菴을 버리고 華菴이라고 고치라고 권유하시며 써준 글씨가 아직 집에 있다. 義 자와 華 자가 비슷한 글자이고 꽃과 나무 괴석을 좋아하시니 그에 맞게 지은 글자이며 금마(익산)의 진산인 용화산(龍華山; 익산 미륵산의 본래 이름)에 화(華)자를 지어 주셨다고 들었다. 또한 선조 문강공(文剛公)의 호 화산(華山)과 서울 북한산의 별칭인 화산(華山)도 감안한 화(華)자라고도 전한다. 고향 금마를 또 하나의 서울로 삼으심을 감안한 글자였던 것이다.
오늘 아내와 이야기 하던 중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화(華)자가 연화문(蓮華文)에 화자이고
또 용화산의 용화나무의 화자인 것을
*용화수 용화나무 : 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이며 동인도에서 자라며 무화과와 같은 열매가 열린다. 불교에서 미래 세계에 부처이 미륵이 이 나무 아래에서 성도 성불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석가모니부처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 성불하였다.
*미륵산의 본래 이름(첫 이름을 포함한 용화산 이전 이름은 아직 모름)이 용화산인 사실은 삼국유사, 익산의 읍지에 나온다. 또 미륵산 기슭에 지은 익산의 두 서원이름이 화암서원(華巖書院)과 화산서원(華山書院)인 것도 이 사실을 증명을 한다. (이 가운데 화암서원은 남촌 이공수 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서원이므로 남촌서원이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할아버지의 손자가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연화문을 연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였다.
금마 연방죽이나 연방죽 선산에서 또 엽동 우리집에서도 익산 왕궁리 백제역사유적지구와 그 안 왕궁리 오층석탑은 잘 보인다.
*익산 왕궁리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대한민국 사적 제408호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289호,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국보 제123호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연방죽과 2.5km, 엽동 우리집과는 2.0km 거리이다.
이 백제역사유적지구 안에는 1964년까지 나의 아버지 소유였던 2400평(열두마지기) 밭이 있었는 데 그 일대를 발굴하자 백제 화장실 터와 공방 터가 발견되었고 나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석탑은 국보 제11호,미륵사지는 사적 제150호) 부근에 나의 외가와 외가 선산이 있다.
나의 5대조께서 익산 웅포면 입점리에서 35여 년간 은거하셨는 데 바로 그 뒷 산(사적 제347호)에서 백제 금동관과 금동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건대 내가 백제 역사문화를 연구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닌 필연, 숙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학사 논문은 「일본 아스카시대에 백제인의 역할」(1987년 2월 중앙대학교 사학과)
석사 논문은 「백제 불상광배에 관한 연구」(1990년 8월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논문은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연구」(2016년 8월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학과)
익산 관련 논문 2편.
「익산益山 연동리蓮洞里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광배光背의 도상 연구圖像硏究」, 미술자료제49호(1992년 6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 사리장엄구에 대한 연구」,百濟硏究49輯(2009년 2월)
>.<2024년 3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