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47-161번지의 인왕산 바위 보존을 바라면서(2026년 5월 29일 작성)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趙源喬)
조선시대 도성(都城)인 한성부(漢城府)의 서쪽 더욱 명확하게는 한성(漢城·한양漢陽) 안 서쪽에 자리한 대표 산이 인왕산(仁王山)이다. 이 인왕산은 도성의 방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풍수지리로 볼 때 도성의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의 백호(白虎)에 해당이 된다. 따라서 인왕산은 도성의 외호(外護)·진호(鎭護)·풍수지리 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을 감안하고 또 도성의 풍치, 경관(景觀)의 유지를 위하여 그 바위·흙 그리고 수목 등은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이 인왕산은 현재 남은 모습이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에서 보듯 특히 바위들이 특별한 모습이다. 색깔, 모습, 크기 등은 마치 저마다 돋보이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하다.
이 인왕산은 특히 광복 이후 상당한 면적이 주택 등으로 변경되었다. 인왕산의 동쪽 지대에 자리한 옥인동 안에도 이 변화 속 비극을 피하지 못하였다. 급경사인 암반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택가가 되어 갔다. 나날이 바위와 산 그리고 흙이 파괴되고 실려 나가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 산이나 산신령이나 필자 모두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심정, 입장이다.
옥인동 47-309번지에 자리한 큰 바위는 국유지인데다가 매우 급경사인 벼랑의 (절벽의) 바위이므로 요행 파괴당하지 않았다. 그 덕택에 바위에 玉流洞(옥류동)이라 새긴 큰 글씨도 남았으니 매우 다행이다.
*이 옥류동 바위 글씨 사진 등을 소개한 글 마한 유민, 서울 인왕산 기슭 옥류동(玉流洞) 계곡의 봄(2021년 4월 6일)
*종로구 누상동 150-1번지(국유지인 누상동 산 1-34와 연접한 곳)에는 바위에 白虎亭(백호정)이라 새긴 글씨가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의 5대조부인 엄한붕(嚴漢朋) 선생의 글씨라고 전한다. 이 글씨도 모퉁이 인데다가 급경사 절벽의 바위에 새겼기로 남았고 특히 학교재단(배화여자중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 소유지이므로 보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옥인동 47-161번지와 가재우물터(노가재 김창업 집터의 우물로 전함)로 전하는 옥인동 47-376번지는 동서 방향 약 20m거리이다.
*종로구 옥인동 47-495번지(국유지) 47-2번지(국유지) 47-386번지(개인 소유 등)도 약 35m 거리인 바로 이웃한 곳이다. 이곳 역시 바위로 이루어진 곳인데 급 경사 절벽이다. 이 바위 절벽은 47-152번지(시유지이며 주차장이 들어섬)의 둘레인데 비교적 잘 보전되었다.
조선시대에 인왕산 기슭 바위에 새긴 글씨가 여럿이다. 그 중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글씨 즉 옥인동 안의 松石園(송석원: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253번지에 있을 것으로 추정)이나 청운동의 大明日月(대명일월: 청운동 52번지 바위 절벽에 있을 것으로 추정)이라는 글씨도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 소개하는 바위는 옥인동 47-161번지 안에 있다. 옥인동 47-309번지 남쪽으로 약 45m 가량 떨어진 곳, 본래 인왕산 기슭이고 산 아래 주택(혹은 별서別墅)들이 자리한 초입에 해당이 된다. 바위 규모는 작으며 그리고 표면에 글씨도 없다. 그러나 이 바위는 주택지 안에 자리하고 큰 규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글씨도 새겨 있지 않음에도 남아 있다. 주택지 안 그것도 낮은 지대에 이처럼 인왕산 바위가 노출되어 남은 것은 기적이다. 남은 이유 중 하나가 시유지(즉 서울특별시의 소유)이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만일 사유지였다면 애정이나 인식이 없는 사람일 경우 주택 대지 면적 효율화만 염두하며 서둘러 파쇄하였을 것이다.
* 옥인동 47-161번지와 약 130m 북쪽 인왕산에 자리한 파괴된 바위를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인왕산 기슭인 종로구 신교동 2-140번지 안에 있는 암수 바위이다. 이 바위는 조선시대 도성 안 신앙처, 매우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그런데 그 바로 위와 언저리로 등산을 편하게 하는 목적의 ‘나무 계단’을 신설한다고 주변에 자재들을 야적해 놓았기에 제발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서울특별시청, 문화재청(문화유산청), 국립무형유산원, 종로구청에 하소연을 하였다. (전직 국립민속박물관장에게도 알림)
그러나 어느 기관도 관심, 애정을 갖지 않았다. 이에 현장 소장에게 등산 계단을 비켜 설치하거나 또는 좀 더 높게 가설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결론은 무참하게 파괴당한 것이다.
*마한 유민,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 신앙 유적 3(신교동 2-140번지) (2021년 2월 27일)
*마한 유민,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 신앙 유적 4(신교동 2-140번지)(2021년 2월 27일)
*마한 윰민,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 신앙 유적 6(신교동 2-140번지) -암수 바위-(2023년 9월 22일)
*마한 유민,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자祈子 신앙 유적(2)·(3) 등의 슬픈 운명(2024년 7월 30일)
부디 기적처럼 살아남은 옥인동 47-161번지 안의 이 소중한 자연 그대로의 바위 그리고 이 바위의 경관이 국유지 안에서 파괴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위하여 여러분께서 관심갖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작성하였다.
*나이 탓인지 점점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두서없이 글을 작성을 하니 매우 죄송한 일입니다만 보존해야 한다는 일념, 전념을 핑계로 주저함 없이 여기에--- 이해를 바랄 뿐입니다.



























인왕산 방앗간 터
인왕산 기대 살며 끼니를 걱정해도
제삿떡 잔칫떡은 거를 수 없다 하며
바위를 뚫어 장만한 절구통이랍니다
사라진 산마을 터 절구통 말합니다
오가는 많은 길손 쓰임새 모르시나
오늘도 추억을 담아 빻우다가 쉰다고
2024년 5월 25일
인왕산 구들돌(구들장돌)
인왕산 바우깎아 피난민 구들 놓아
방 하나 만들어도 무허가 나라의 땅
어느날 헐리고 나니 구들돌만 남았네
인왕산 옥인동과 누상동 등 오를 때면
수많은 구들돌은 언제나 말합니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 수만명을 안다고
2024년 5월 23일
*전북 익산 지역에서는 구들(구들장)에서 중심이 되는 '내모지게 깍은 돌'인 '구들들' 또는 '구들장돌'을 대개 '방독'이라고 한다. 이 방독은 필자가 어릴 때에는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762번지 중에서 신용리 226번지와 맞닿은 부위(개울가 벼랑)에서 돌을 캐 다듬어 판매하는 것을 보았다.
아궁이 앞 매움과 행복
불난데 부채질도 아궁이 앞이라면
매워서 흘린 눈물 방구들 덮힌다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행복인냥 맞으리
2024년 5월 24일














구들장
인왕산 바우깎아 피난민 구들 놓아
방 하나 만들어도 무허가 나라의 땅
어느날 헐리고 나니 구들장만 남았네
인왕산 옥인동과 누상동 등 오를 때면
수많은 구들장은 언제나 말합니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 수만명을 안다고
2024년 5월 23일
아궁이 앞 매움과 행복
불난데 부채질도 아궁이 앞이라면
매워서 흘린 눈물 방구들 덮힌다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행복인냥 맞으리
2024년 5월 24일















우측 화제는 강희언이 쓴 것,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좌측은 표암 강세황의 화평, 실제 경치를 그린 그림은 매번 지도와 너무 닮아서 근심인데, 이 화폭(그림(은 충분히 참 보습이면서도 또 화가의 여러 그림 그리는 방식을 잃지 않았다寫眞景者 每患似乎地圖 而此幅旣得十分逼眞 此不失畵家諸法 豹菴)
* <-강희언은 서울 삼청동에서 62세 위인 선배 화가 정선(鄭敾)과 이웃하여 지내면서 그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姜世晃)과 교유가 깊었으며, 7세 아래인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김홍도(金弘道)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김홍도는 1778년 여름에 강희언의 집에서 풍속도 병풍을 그리기도 하였다. 강희언은 1781년 김홍도의 집에서 열렸던 진솔회(眞率會)에 참석하였다. 이로 미루어 1781년까지는 생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